해양수산부는 2020년부터 기업·단체·학교 등이 특정 해변을 맡아 자신의 반려동물처럼 가꾸고 돌보는 ‘반려해변’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사진은 제주맥주가 입양한 제주 금능해수욕장 모습. 해양수산부 제공
바다식목일(5월10일)을 하루 앞둔 지난 9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월포해변에 하얀색 단체복에 감색 모자를 깊게 눌러쓴 어린 학생 23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변에서 200m 남짓 떨어진 월포초등학교 학생 20명과 병설유치원생 3명 등 전교생이 총출동한 것이다.
지난 9일 경상북도 포항시 월포해변에서 월포초등학교 학생과 병설유치원생 23명이 갯방풍과 번행초 등 염생식물을 심고 있다. 월포초등학교 제공
월포해변은 최근 몇년 사이 파도를 타려는 서퍼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곳이다. 해변 인근 솔밭에 도착한 학생들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모종삽을 꺼내 들고 땅부터 팠다. 이어 지난겨울부터 학생들이 직접 키운 갯방풍과 번행초 모종을 정성스럽게 심었다. 갯방풍과 번행초는 바닷가의 모래땅 등 소금기가 많은 곳에서도 자라는 염생식물로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나 은신처 구실을 할 뿐 아니라 해안침식을 막고 바다로 흘러가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기능도 한다.
염생식물을 다 심은 학생들은 모래사장을 지나 해변 가까이 몰려갔다. 인솔 교사 모성현씨가 수신호를 하자, 학생들은 ‘나가자, 바다로, 세계로’란 구호를 목청껏 외치며 저마다 들고 있던 유용미생물(EM) 흙공을 바다에 던지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9일 경상북도 포항시 월포해변에서 월포초등학교 학생과 병설유치원생 23명이 갯방풍과 번행초 등 염생식물을 심고 있다. 월포초등학교 제공
“이제 비치코밍(beachcombing)이야. 다들 알지?” 교사의 말에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나무 집게와 10리터짜리 생분해봉투를 꺼내 들었다. 비치코밍은 말 그대로 해변을 빗질하듯 바다 표류물이나 쓰레기를 주워 모으는 일을 말한다. 학생들은 1.2㎞에 이르는 백사장 곳곳을 다니며 고사리손으로 버려진 쓰레기를 익숙한 듯 집어냈다. 해변 곳곳에는 담배꽁초와 폭죽 잔해, 음료수병 등 각종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날 학생들이 30분 남짓 비치코밍을 해 10리터짜리 봉투 5개 분량의 쓰레기를 수거했다.
지난 9일 경상북도 포항시 월포해변에서 월포초등학교 학생과 병설유치원생 23명이 해변 정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월포초등학교 제공
정일독(6학년)군은 “월포해변은 지난해 10월 우리 학교가 입양한 반려해변이다. 해변을 입양했다는 얘길 하면 주위에서 다들 신기해하면서 부러워한다. 반려동물처럼 월포해변에 자주 가서 깨끗하게 가꾸고 건강하게 돌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말하며 방긋 웃었다. 이윤지(5학년)양도 “친구들과 함께하면 쓰담(쓰레기 담기)·쓰줍(쓰레기 줍기)도 재밌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 우리 모두의 바다를 아름답게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반려해변’이 뜨고 있다. 반려해변은 기업·단체·학교 등이 특정 해변을 맡아 자신의 반려동물처럼 가꾸고 돌보는 해양수산부의 이색 프로그램이다. 1986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시작해 미국 전역뿐 아니라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점차 확산하고 있다.
해양수산부가 반려해변을 처음 도입한 것은 2020년 9월이다. 제주도와 시범사업을 했는데, 처음엔 ㈜제주맥주, 하이트진로, 공무원연금공단 등 3개 기관만 참여했다. 하지만 2년7개월이 지난 현재(4월 기준)는 128개 기관이 80개 해변을 맡아 ‘반려’하고 있다. 참여 광역지방자치단체도 2020년 제주에서 2021년 인천·충남·경남·전남, 2022년 부산·경북이 추가됐고, 올해는 강원까지 참여를 결정했다.
강원도 해변에서 발견된 북한 쓰레기 모습. 비닐에 ‘탄산단물’이라고 적혀 있다. 빛나르고 제공
해양수산부는 올해 바다를 접하고 있는 전국 11개 연안 광역지자체 모두와 협약을 맺고 100개 해변, 200개 기관으로 반려해변 사업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광역지자체 가운데 참여 기관이 가장 많은 곳은 전남이다. 전남에서만 26곳이 반려해변을 입양해 관리하고 있다. 그다음은 충남(25곳), 제주(18곳), 경남(11곳), 경북·부산(10곳) 등이다.
특히 지에스(GS)리테일과 씨제이(CJ)제일제당, 롯데홈쇼핑 등 기업들의 참여 열기가 뜨겁다. ‘바다를 돌보고 가꾼다’는 취지가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조하는 최근 기업들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기업뿐 아니라 대사관, 대학교 동아리, 가수 팬카페 등 참여 기관·단체도 다채롭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지난해 6월 인천 마시안해변을 반려해변으로 입양했다.
지난 1월 충남의 용무치·마섬포구 해변과 석문방조제를 입양한 가수 박창근 팬클럽 ‘포그니’의 주영희(57)씨는 “가수 박창근씨가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 반려해변을 입양하게 됐다. 충남에서 시작했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는 회원들과 협의해 인천과 전남 등의 해변도 추가로 입양하는 등 전국을 주황(팬클럽 상징색)으로 물들일 계획이다. 반응도 좋아 최근에는 콘서트 참여보다 반려해변을 가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고 귀띔했다.
지난달 전남 여수의 만성리 검은모래해수욕장을 입양한 대학생 동아리 아전수재 회원들이 해변 정화 활동을 한 뒤 사진을 찍고 있다. 아전수재 제공
지난달 전남 여수의 만성리 검은모래해수욕장을 입양한 장우석 전남대 아전수재 회장은 “아전수재는 ‘아름다운 전남 바다를 위한 수산·해양쓰레기 재활용’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지역 대학생 6명에서 시작해 지금은 67명으로 회원이 늘었다. 대학생들이 지역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에 성취감도 느끼고 있다. 쓰줍에 그치지 않고 쓰레기를 수거해 공예품을 만드는 등 각자의 전공을 살리는 방향으로 활동을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강원도 고성군 공현진해변에서 쓰담속초 등이 주관한 해변 정화 활동에서 참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빛나르고 제공
해양수산부가 반려해변에 주목한 것은 정부 주도의 해양쓰레기 수거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해변 길이는 약 1만5천㎞에 이른다. 면적으로 따지면 육지 면적의 4.4배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연간 14만5천톤 정도의 해양쓰레기가 발생한다. 이 쓰레기는 해양 생물의 생명을 위협할 뿐 아니라 선박 사고와 어획량 감소, 해양 관광산업 저해 등의 문제를 일으킨다.
강예지 해양수산부 해양보전과 사무관은 “정부 주도의 해양쓰레기 수거정책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민간이 주도적으로 해변을 입양·관리하는 해양쓰레기 관리 생태계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더욱 많은 시민들이 반려해변 프로그램에 참여해 쓰레기를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수거하면서 심각성을 피부로 느낀다면 해양환경 보호를 위한 생활 속 행동 변화까지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난해 7월 강원도 강릉시 금진해변에서 해변 정화 활동 참가자가 주운 낚시용품 쓰레기. 빛나르고 제공
누리집 통해 신청 뒤 스마트폰 앱으로 활동 기록
반려해변 입양 방법은 간단하다. ‘바다가꾸기’(caresea.or.kr) 누리집에서 신청하면 된다. 해양환경 보호에 관심이 있는 기업·단체·학교 등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참여 기간은 2년(연장 가능)이며 연 3회 이상 해변 정화 활동을 하고 해양환경 보호 인식 증진을 위한 캠페인을 연 1회 이상 벌이면 된다. 대신 모든 참가자는 해변에서 수거한 해양쓰레기의 종류와 수량을 스마트폰 앱 ‘클린스웰’(Clean Swell: 미국 비영리단체가 개발한 쓰레기수거 기록 앱)을 이용해 기록해야 한다. 이 기록은 정부의 해양쓰레기 저감 정책 수립 시 기초자료로 활용된다.
반려해변을 입양하면 해변에 해당 기관의 이름이 적힌 선간판 설치가 지원된다. 또 반려해변 프로그램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권역별로 5개 민간단체를 지역별 코디네이터로 지정해 입양 기관들을 돕고 있다.
지난해 8월 쓰담속초가 속초지역 해변에서 수거한 폐그물과 플라스틱, 파도에 떠밀려 온 중국산 냉장고 등을 활용해 만든 작품 전시회 ‘쓰레기 쿨쿨(Cool-Cool)’ 모습. 빛나르고 제공
강원권 반려해변 코디네이터를 맡은 ‘빛나르고’도 2021년부터 청년 3명이 모여 ‘쓰담속초’란 단체를 만들어 해안 정화 활동을 해왔다. 이재환 빛나르고 이사는 “강원도만 해도 고성에서 삼척까지 수많은 해변이 있지만 일부 유명 해변을 빼면 상당수가 관리 사각지대에 놓였다. 처음엔 봉사활동이라고 생각하며 시작했지만 지금은 쓰담 활동 자체의 매력과 재미에 푹 빠졌다. 70~80년대 라면봉지부터 북한 음료수병 등 희귀한 물건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더 많은 분을 반려해변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