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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프로메테우스 후예들’ 위로하고자 기록해요”

등록 2021-09-02 19:54수정 2021-09-03 02:35

[짬] 광원 사진작가 전제훈씨
전제훈씨는 1983년부터 탄광에서 화약관리사로 일하며 막장 동료들의 노동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국내 유일한 광원 사진작가이다. 작가 제공
전제훈씨는 1983년부터 탄광에서 화약관리사로 일하며 막장 동료들의 노동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국내 유일한 광원 사진작가이다. 작가 제공

“언젠가는 산업화 주역이었던 탄광들이 모두 사라지겠지만, 우리는 그 시대의 흔적이라도 남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내 석탄산업은 1989년부터 추진된 석탄산업합리화 조처 이후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1988년 347곳에 이르던 탄광은 현재 4곳(대한석탄공사 3곳·민영 1곳)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 탄광조차도 머지않아 모두 문을 닫을 처지다. 곧 사라질 탄광의 생생한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막장에서 일하며 10년 넘게 기록 작업을 해온 사진작가가 있다. 국내 최대이자 유일한 민영탄광인 삼척의 경동 상덕광업소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는 전제훈(59) 작가다.

지난 31일 전화로 만난 전 작가는 요즘 최대 관심사가 ‘폐광지역 순회 전시회’ 준비라고 말했다. 전시회 제목은 <증산보국>이다.

1983년 대학 졸업뒤 형따라 탄광으로
38년째 갱내 화약관리사로 근무중
2010년부터 막장 동료 노동자들 촬영

4일 문경부터 폐광지역 순회 사진전
70년대 노동착취 구호 ‘증산보국’ 주제
“광원들 진폐증 고통은 여전한 현실”

“중학생 때 형님이 일하던 탄광에 갔는데 정문에 ‘증산보국’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탄광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노동 착취 구호에 불과했다.”

이번 전시회는 ‘증산보국’ 최전선에서 일하다 지금은 진폐병으로 고생하는 옛 광원들을 위해 기획됐다. 전 작가는 “탄광에서 일하다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리던 광산 노동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얼마 남지도 않았다. 내 사진을 본 선배 광원들이 눈물을 감추면서 옛 탄광 시절을 추억하고, 잊혀 가는 현실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고 전시회라도 열어 위로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회는 경북 문경(9월4일~)을 시작으로 충남 보령(10월4일~), 전남 화순(11월23일~), 강원 태백(12월12일~) 등 석탄 생산지역을 돌아다니며 열릴 예정이다. 왜 문경이 첫 전시장이 됐을까. “1926년 남한 최초로 광업권이 설정되는 등 광산개발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다. 지금은 그 시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아직도 곳곳에 진폐 광원들의 신음과 고통이 남아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1983년 삼척공업전문대 자원공학과를 졸업한 뒤 탄광에 입사한 그는 40년 가까이 갱내 화약관리기사로 근무하고 있다. 처음엔 취미로 혼자 사진을 찍던 그는 1996년 태백 한밝사진동우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사진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초기엔 밤 풍경이나 은하수를 주제로 한 풍경 사진을 주로 찍었다. 직업이 광원이다 보니 사진을 배우던 초기 종종 동료들의 모습을 찍긴 했지만 기록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광원과 광산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0년부터다. 우연히 탄광 노동자를 주제로 한 사진전을 봤는데, 외부자가 아닌 내부자의 시선에서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현장을 기록하는 일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후 2017년 ‘동강국제사진전’ 참가를 시작으로, 2018년 ‘강원국제비엔날레’, 2019년 ‘광부1 검은영웅들’, 2020년 ‘광부2 프로메테우스의 후예들’, 2021년 ‘빛을 캐는 광부’ 등 탄광을 주제로 한 사진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더러 다른 작가들도 탄광을 찾아와 광원들의 모습을 찍지만, 직접 막장에서 일하면서 있는 그대로 동료의 속살을 기록하는 사진과는 내용이나 의미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그 역시 처음엔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10여년 넘게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라도 땀방울과 탄가루로 범벅된 작업복과 시커먼 얼굴이 외부에 공개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곧 사라질 탄광의 생활과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설득하고, 나중에 사진을 인화해 선물로 주면 웃음 화답이 돌아오곤 했단다.

현장이 갱구에서 멀게는 4400m나 떨어진 갱도인 탓에 기술적인 어려움도 많다. 지열 때문에 현장은 찜질방을 방불케 하고, 습도도 높기 때문이다. 화약 연기와 발파 분진, 탄가루 때문에 값비싼 카메라 장비들이 고장 나기 일쑤다. 특히 갱도 안에서는 어두운 데도 절대 스트로보(플래시)를 사용할 수 없다. 어둠에 적응한 광원들의 눈을 갑자기 부시게 하면 작업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갱도 안 희미한 안전등에 기대어 사진을 찍어야 한다. 감도(ISO) 맞추기 등 오랜 경험과 기술 없이는 좋은 작품을 담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그가 지난 10여년 동안 찍어온 사진은 10만장가량에 이른다.

전 작가는 최근에는 사진뿐 아니라 안전모와 안전등, 안전작업복, 안전장화 등 광산의 흔적을 수집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벌써 2만여점을 모았다. 은퇴한 뒤에도 탄광 주변 풍경과 광산 사택 등 광산의 흔적을 찍는 일을 계속할 계획이다.

그는 “광원은 ‘프로메테우스의 후예’다. 산업화와 경제 발전의 일등공신이었지만, 합리화조처 이후 탄광촌은 폐광촌으로 전락하고 노동자들은 진폐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기록자의 소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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