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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위대한 평범인’ 어르신들에게 자서전 헌정했어요”

등록 2023-02-01 07:00수정 2023-02-01 09:15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동아리 활동
괴산고생 12명 구술 기록해 펴내
왼쪽부터 이상훈 지도사, 허수정·황경희·손다혜·서재범 괴산고 학생, 백창화 작가.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왼쪽부터 이상훈 지도사, 허수정·황경희·손다혜·서재범 괴산고 학생, 백창화 작가.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노인 하나가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사라지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격언이다. 말리 작가 아마두 함파테바가 1962년 유네스코 연설 때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충북 괴산고 학생들이 도서관처럼 넓고, 깊은 이웃 노인 3명의 인생을 담은 어르신 자서전 <길 위에 삶을 풀어놓다>를 최근 펴냈다. 책은 지난해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동아리 ‘은가비’ 활동을 한 괴산고 1~3학년 학생 12명이 함께 썼다. 2학년 박세정(17)양은 어르신들의 얼굴 그림을 그렸고, 괴산 숲속작은책방의 백창화 작가가 퇴고를 도왔다.

어르신 자서전 &lt;길 위에 삶을 풀어놓다&gt;.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어르신 자서전 <길 위에 삶을 풀어놓다>.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이들은 지난해 3월부터 연구희(72·괴산읍 정용리)·신국호(73·괴산읍 수진리)·윤명순(71·괴산군 장연면)씨의 구술을 받아 기록했다. 16쪽짜리 콩트처럼 짧은 자서전엔 녹록지 않은 어르신들의 삶이 담겨 있다. 자서전 편찬을 도운 이상훈(51)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지도사는 “아이들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어르신들을 직접 선정해 인터뷰하고, 글을 만들어 뜻깊다”며 “책엔 폐지를 모으고, 문화의집에서 청소하고, 장애인 시설에서 밥을 짓는 ‘위대한 평범인’ 3명의 일생이 진솔하게 녹아있다”고 말했다.

어르신 자서전 &lt;길 위에 삶을 풀어놓다&gt;의 주인공 연구희(오른쪽 둘째)씨와 부인에게 책을 전달한 괴산고 필자들. 맨왼쪽 강지원, 맨오른쪽 서재범 학생.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어르신 자서전 <길 위에 삶을 풀어놓다>의 주인공 연구희(오른쪽 둘째)씨와 부인에게 책을 전달한 괴산고 필자들. 맨왼쪽 강지원, 맨오른쪽 서재범 학생.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연 할아버지는 피란민의 자식으로 살아온 한 많은 인생을 풀어놨다. 그는 “꿈이란 걸 가질 수 없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던 터라 공부를 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중매를 통해 만난 아내, 한밤중 불이 났을 때 강아지가 깨워 화를 면한 일, 빵과 함께 만 원짜리 한장을 주머니에 넣어 준 여학생 등 이야기를 잔잔하게 들려줬다. 폐지·재활용품 등을 수거하며 생활하는 그는 끝머리에 “지금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순간이 매우 행복하다”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 황경희(19·괴산고 졸업)양은 “할아버지의 인생을 통해 가족 사랑, 희생, 봉사 등 많은 것을 깨달았다.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어르신 자서전 &lt;길 위에 삶을 풀어놓다&gt;의 주인공 윤명순(오른쪽 둘째)씨에게 책을 전달한 괴산고 필자들. 왼쪽부터 조은석·강지원, 맨오른쪽 서재범 학생.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어르신 자서전 <길 위에 삶을 풀어놓다>의 주인공 윤명순(오른쪽 둘째)씨에게 책을 전달한 괴산고 필자들. 왼쪽부터 조은석·강지원, 맨오른쪽 서재범 학생.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장연면으로 귀촌한 지 10년째인 윤 할머니는 1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5남매 맏딸로 살아온 파란만장 인생을 들려줬다. 그는 “학창시절이란 게 없었다. 배우지 못했으니 읽고 쓰지 못해 불편했다. 어려운 글자는 아직도 힘들다”고 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어깨너머로 익힌 글, 귀촌한 뒤의 생활 등을 담았다.

어르신 자서전 &lt;길 위에 삶을 풀어놓다&gt;의 주인공 신국호(맨 왼쪽)씨의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는 괴산고 학생들.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어르신 자서전 <길 위에 삶을 풀어놓다>의 주인공 신국호(맨 왼쪽)씨의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는 괴산고 학생들. 괴산 청소년문화의집 제공

신 할아버지는 여동생의 소개로 군대 휴가 때 결혼한 아내 이야기를 반 넘게 했다. 그는 “아내는 참 고마운 사람이다. 술·담배를 좋아해 몇 년 전 암 수술까지 한 나를 뒷바라지해주느라 맘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하다. 이제 술을 끊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며 산다”고 했다.

학생들은 지난 25일 갓 나온 책을 어르신들에게 헌정했다. 3학년에 되는 서재범(18)군은 “어르신의 인생 기록에 혹여 누가 될까봐 수차례 방문하고, 기록하고, 다듬은 모든 경험이 뜻깊었고, 가장 보람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연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서전까지 만들어줘 너무 고맙다. 자식과 이웃에 자랑거리가 생겼다”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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