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의문사 30년…추모대회 열려
입사 동기 김진숙 위원 “영혼만이라도 함께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입사 동기 김진숙 위원 “영혼만이라도 함께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6일 열린 ‘제30주기 박창수 열사 추모대회’에서 추모사를 읽고 있다.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6일 열린 ‘제30주기 박창수 열사 추모대회’에서 추모사를 읽고 있다.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60/604/imgdb/original/2021/0507/20210507501424.jpg)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6일 열린 ‘제30주기 박창수 열사 추모대회’에서 추모사를 읽고 있다.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91년 5월7일 백골단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안영병원 영안실에 난입하자, 고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유족들이 격렬하게 제지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5월7일 백골단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안영병원 영안실에 난입하자, 고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유족들이 격렬하게 제지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70/636/imgdb/original/2021/0507/20210507501425.jpg)
1991년 5월7일 백골단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안영병원 영안실에 난입하자, 고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유족들이 격렬하게 제지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6월 30일 고 박창수씨의 아들 용찬군이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노제를 지내기 위해 회사 정문을 나서는 장례행렬의 선두에 서서 행진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6월 30일 고 박창수씨의 아들 용찬군이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노제를 지내기 위해 회사 정문을 나서는 장례행렬의 선두에 서서 행진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70/754/imgdb/original/2021/0507/20210507501426.jpg)
1991년 6월 30일 고 박창수씨의 아들 용찬군이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노제를 지내기 위해 회사 정문을 나서는 장례행렬의 선두에 서서 행진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살아서 다시 맞는 봄,
우린 언제나 억울함 없이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때 여섯살이었던 네가 서른 여섯살이 된 세월. 우린 언제쯤이면
울지 않고 그 이름을 불러 볼 수 있을까.
너에겐 기억도 아련한 아빠겠지만 우리에겐 청춘을 함께 보낸
친구였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함께 꿈꿨던 동지였던 사람.
용찬아 기억나니? 네가 세 살 때 식목일이었다.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던 날, 몇 사람이 어린이대공원엘 놀러 갔었고
네가 뭐가 탈이 났는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며
쓰러졌고 너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로 널 업고 산길을 비친듯이
뛰어내리던 네 아빠의 모습을 40여년이 지났어도 잊을 수가 없다.
집회 때면 아빠 껌딱지였던 네 손을 잡고 와선 널 보며
봄꽃 보다 환하게 웃던 아빠. 박창수 자살이라는 뉴스가
거짓이라고 확신했던 것 그 웃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래오래 살았으며 얼마나 좋았을까. 너와 네 동생의 아빠로 오래오래 살고 싶었을
사람.
그러나 노동자로 인간답게 사는 꿈이 죄가 되던 시절이었었단다.
네 아빠가 위원장에 당선되던 날. 난 감옥에 있었고
투표를 마친 네 아빠가 면회를 와서는 붉어진 눈으로 창살을 붙잡고
“인자 고생 끝났는가. 조금만 더 고생하이소”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거의 매일 만나 회의를 하고 숱한 시간들을 함께 보내며
수많은 말들을 나누었는데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정의롭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끌려가던 시절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이 저수지에서 바다에서 피멍든 시신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옥상에서 내던져지기도 하던 시절.
용감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하던 시대
주검마저 빼앗겼던 기가 막히던 세상.
맘 놓고 울지도 못했던 봄, 그렇게 서른 번의 봄이 지나갔고
그때 박창수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시던 백기완 선생님도
아빠의 곁으로 가셨다.
네 아빠를 위원장으로 추천하고 변호했던 분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그 기막힌 죽음의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싸웠던 분이 대통령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
거의 날마다 사람이 죽던 그 잔인한 봄으로부터 우린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걸까. 아직도 노동자들의 세상은 (네 아빠가 있던)
안양구치소이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세상과 까마득히 먼 85 크레인에 고립돼 있다.
구속됐던 네 아빠도 해고자다. 같이 복직하고 싶었던 내 동기.
네 아빠의 영혼만이라도 함께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네 아빠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주던 그 배관공장을 다시 가보고 싶었다.
용찬아,
어버이날이면 요구르트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렸다는
네가 결혼을 하는구나. 너도 이제 곧 네 아이를 보며
네 아빠처럼 웃는 아빠가 되겠지 축하한다. 용찬아
그리고 미안해. 오래오래 행복하려무나.
자랑스러운 박창수 위원장의 아들로, 이 땅의 노동자로
당당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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