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된 이춘재가 앉은 법정 모습.
“예, (제가 진범이) 맞습니다.”
1980년대 중반 전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살인사건 범인 이춘재(57)는 2일 법정에서 ‘화성지역에서 일어난 10건의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맞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짧게 답했다. 첫 사건이 일어난 지 34년 만에 범행을 공개 자백한 셈이다.
2일 수원지법 형사12부(재판장 박정제) 심리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9차 공판에 검찰과 변호인 양쪽의 증인 자격으로 출석한 이씨는 짧은 스포츠머리로 나타났다. 군데군데 흰머리가 자라 있었다. 마스크를 쓴 채 청록색 수의와 흰색 운동화를 착용한 이씨의 얼굴 곳곳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하지만 가늘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 만은 30여년 전 몽타주 속 사진과 다름없었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당시 경찰이 만들어 뿌렸던 용의자 몽타주.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진실만을 말하겠다”라고 선서를 한 뒤 증인석에 앉은 이씨는 애초 경찰에서 자백한 대로 ‘진범 논란을 빚어온 8차 사건을 비롯해 수원과 화성, 충북 청주 등지에서 모두 14명의 부녀자를 살해했다’고 재확인했다.
그는 ‘왜 그런 사건을 저지르게 됐느냐’는 물음에는 “지금 생각해도 당시에 왜 그런 생활을 했는지 정확하게 답을 못하겠다. 계획하고 준비를 해서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고 당시 상황에 맞춰 (살인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라고 담담하게 답했다.
2일 오후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9차 공판에 재심 청구인 윤성여씨가 출석하며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윤씨는 이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을 복역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연합뉴스
이날 법정에는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가 나와 재판을 지켜봤다. 윤씨는 피고인석에 앉아 증인석에서 진술하는 이씨의 모습을 봤다. 윤씨는 이씨가 과거 범행 현장 주변을 묘사하는 답변을 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당시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다’는 등의 말을 할 때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8차 사건은 1988년 9월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박아무개(당시 13살)양이 성폭행당한 뒤 피살된 사건이다. 윤씨는 이듬해 범인으로 지목돼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됐다. 그는 이씨가 범행을 자백한 뒤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이 사건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올해 1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지난 9월 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인 체모가 30년의 세월이 흐른 탓에 디엔에이(DNA)가 손상돼 감정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나오자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이씨를 직접 법정에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씨가 증인 신분에 불과하다며 사진, 영상 촬영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날 재판에는 이씨의 모습을 보려는 취재진과 방청객이 몰려 방청권이 동났다.
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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