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맨 앞)을 비롯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중 마지막 복직자들이 4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앞에서 출근 인사를 마친 후 교육장으로 이동하는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11년 만의 복직이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4일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으로 출근했다. 마지막 복직자 35명과 함께였다.
2009년 8월6일 오후 전국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었던 한 전 위원장은 77일 동안 이어진 파업농성을 풀었다. 이명박 정권 당시 터진 세계금융위기 속에 노동자 2646명을 해고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결국 회사 쪽과 정리해고 합의안에 서명한 뒤였다. 평택경찰서로 호송되기 전 그는 줄지어 선 채 경찰 호송차에 올라타던 동료 노조원들 한명, 한명과 눈물의 포옹을 했다.
“함께 살자고 싸웠지만 사실 국가가 모든 공권력을 동원한 진압에 노동자들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죠. 쓰라린 패배를 당한 것에 대한 미안함, 동지들에 대한 사랑…. 참 이루 말할 수 없었죠.”
한 전 위원장은 정확히는 10년 10개월 만인 4일 자신의 청춘을 보냈던 쌍용자동차의 직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이날부터 평택시 공도읍 쌍용자동차 연수원으로 입소해 복직에 따른 교육에 들어갔다. <한겨레>는 이날 전화로 쌍용차 복직과 앞으로 쌍용차 문제 등과 관련한 한 전 위원장의 생각을 들어봤다.
-지난 11년이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맨 처음 무엇이 떠올랐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트라우마와 국가 폭력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 쌍용자동차 투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어느 순간 ‘살아남는 자가 강자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자존심, 정의, 옮음도 다 버려라.’ 이렇게 강요했다. 결국 인간의 영혼을 팔라는 이야기였는데, 거기에 우리는 ‘우리도 인간이고, 노동자이고, 옳은 것은 옳고, 억울한 것은 억울하다’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런 시간이 11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싸우도록 해왔던 근본 밑거름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더라.”
지난 2009년 12월 쌍용자동차 노사가 정리해고 문제 등을 둘러싼 ‘끝장 교섭'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쌍용차 11년이 우리 사회와 국민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
“사회는 노동가와 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장과 개발을 최고의 가치로 해오며 사회안전망은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늘 위기 때마다 인건비를 절약하는 방식의 구조조정에 익숙해 있었다. 쌍용차의 파업농성은 2009년 세계금융위기 터졌던 시기와 맞물려서 당시 정부는 노동자들은 언제든 기업을 살리기 위한 소모품으로 각인되어야 하는 상황을 쌍용차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고 2020년 오늘의 쌍용차를 맞고 있다. 그때는 상하이차, 지금은 마힌드라인데 이번에는 코로나19와 맞물리기는 했으나 이 상황에서 과연 함께 살자는 노동자 목소리를 한국사회가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우리 사회가 중요한 분수령을 맞고 있다고 본다. 그때와 같이 지금도 동일한 방식으로 할 것인가?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금융위기 이전과 이후, 노동자와 노사관계, 한국사회 전반의 사회안전망을 뜯어고칠 것인가와 같은 엄청난 숙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노사관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일단은 한국사회 불평등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인데 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과 노사관계가 맞물려야 한다. 특히 중요한 문제는 사실 조직 노동자에 대한 언론의 비판에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쌍용차가 다시 11년 만에 위기가 왔다. (2009년) 회사가 어렵다고 해서 노동자가 다 잘려나간 상태에서 이 모양이 됐는데, 이 상황을 언론은 분석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책임 전가할 때만 노동자의 이름을 찾는다. 결국은 무엇이냐. 현재의 지배구조나 경영 전반을 회사가 독점하는 것을 수술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식 공동결정제도처럼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회사에 비전과 함께 살자는 방안에 녹아낼 수 있는 근본적 구조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왔다.”
-복직되기 전 지난 11년 동안 동료 노동자 30명이 숨졌다. (한 전 위원장은 이명박 정권 당시 쌍용차 파업농성으로 구속돼 3년의 실형을 받고 복역했으며 석방된 뒤 2014년 12월 민주노총 첫 직선제로 위원장에 당선됐으나 박근혜 정권 당시 민중총궐기 등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3년의 실형을 받고 수감됐다가 석방됐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절망과 희망은 때로는 아주 근사치에 있더라. 절망이 극한치에 왔을 때 갑자기 죽음을 선택하는 동지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죽음이 세상에 ‘이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주었고 그 메시지가 또다시 우리에게 희망을 건네주었다. 죽지 말고 함께 나의 정리해고 문제를 넘어서 한국사회가 일하다 아무렇게 쓰다가 버려지는 노동자들이 넘쳐나서는 안되겠다는 것으로 바뀌면서 힘들지만 11년을 견딜 수 있는 힘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결국은 절망이 죽음으로, 그 죽음이 다시 희망으로 순환된 것이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쌍용차 노사가 정리해고 합의안에 서명한 2009년 8월6일 저녁 경기 평택시 쌍용차 평택공장 승리광장에서 한상균 전국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파업농성에 참여했던 노조원들과 헤어지기에 앞서 포옹하면 울먹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1년 만에 복직한 쌍용차가 다시 어렵다고 한다.
“2009년 때나 지금이나 경영진이 얼마나 회사를 좋은 회사로 만든다고 호언장담했는가. 그동안 경영진들이 바뀌기는 했으나 그들이 쌍용차에 어떤 애정을 가지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은 마힌드라 자본도 상하이차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투자했다. 이랬을 때 쌍용차가 계속 존속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뻔했다. 연구개발(알엔디)을 더 적극적으로, 쌍용차의 사회적 인식 제고를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이런 부분에서 게을리했다. 예컨대 복직 합의를 해놓고 어기거나 티볼리 같은 좋은 신차를 내놓은 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쌍용차를 돕겠다고 나섰는가. 저도 감옥에 있을 때 (쌍용차를) 수백대 팔았다. 출소해서 메시지를 보내온 수많은 시민들의 문자들을 기억한다. 김제동씨나 이효리씨처럼, 정말 음으로 양으로 쌍용차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들이 많았는데 회사 경영진들이 이것을 놓쳤고 마힌드라 전략에 제 목소리를 못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쌍용차가 다시 어설프게 넘어가면 위기가 또다시 온다. 미래 차 중심으로 한 자동차업계 경쟁이 치열해진 과정에서 평택 지역경제와 맞물려 쌍용차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출발점을 새롭게 정립할 때가 왔다.”
-쌍용차라는 일터의 새로운 기대가 큰 것 같다.
“저는 제 청춘을 바친 애증의 회사다. 지금 여러가지 쌍용차 정상화 방안들이 들리는데, 이 문제는 더 공론화되어야 한다. 어느 누가 정보를 독점하거나, 시혜적으로 풀 수 있는 상황 아니다. 특히나 공장 안에 하청 노동자들이 많은데 저는 이들을 긍극적으로 차별 없이 정규직화해야 한다고 본다. 혹시라도 쌍용차 정상화 방안 속에 이들을 구조조정 우선 대상으로 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쌍용차가 국민으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런 최악의 선택을 생각한다면 빨리 접는 것이 좋겠다는 그런 고민이 있다.”
-쌍용차 해고자 복직에 시민들의 여론과 지지가 컸다.
“국내·외에서 연대가 있었고 국내에서도 사실 수많은 시민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많은 것을 보내주시고, 연대해주셨다. 국내·외에서 많은 분이 보내주신 희망의 메시지들을 저희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복직을 계기로 저희가 받은 따뜻한 마음을 더 많은 어려운 노동자, 민중에게 돌려줘 이 사회를 더 나은 세상으로, 더 밝은 세상으로, 노동이 존중되는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을 약속드린다.”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