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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수도권

3·1 운동 당시 처단된 일제 경찰 추모비 사진 발굴

등록 2020-03-01 15:58수정 2020-03-02 02:32

화성 제암리사건 주민 탄압 중 사망한 일본 경찰 추모비
해방 뒤 파괴…독립기념비로 대체
제막 당시의 순직경찰관 초혼비 모습. <경성일보> 1925년 6월30일.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제막 당시의 순직경찰관 초혼비 모습. <경성일보> 1925년 6월30일.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3·1 운동 당시 경기도 화성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다 분노한 민중에 의해 살해된 일본인 경찰들을 위로하기 위해 일제가 건립한 추모비 사진이 확인됐다.

경기도의 의뢰로 ‘경기도 친일문화 잔재 조사 연구’를 하는 민족문제연구소는 1일 수원화성의 방화수류정 언덕에 세워져 있던 순직경찰관 초혼비 사진을 공개했다.

비석에는 ‘순직경찰관 초혼비’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는데 비석의 주인공은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와 화수리 경찰관주재소의 순사 가와바다 도요타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함께 공개한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1937)에는 노구치 순사부장 등의 순직 원인을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 사건 때 폭동 진압 중 투석으로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기록돼 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그간 일제가 3·1 운동 때 순직경찰관 초혼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으나 실물 사진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말했다.

1969년 수원 팔달산으로 옮겨진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69년 수원 팔달산으로 옮겨진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들은 화성 일대에서 만세 사건이 일어나자 제암리교회 학살 등 비폭력 저항에 나선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다 주민들에 의해 당시 살해당했다.

한편, 이런 순직경찰관 초혼비는 해방 직후에 파괴됐다. 이후 1948년 8월15일 같은 자리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건립됐으며 이 기념비는 1969년 10월15일 3·1 독립기념탑과 함께 현재 수원 팔달산 중턱으로 이전 설치됐다.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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