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외국인 농업노동자 무차별 단속에 절규 “외국인 없이 농사 불가능한 상황 된 지 오래 합법 쓰고 싶지만 없다, 불법 봐달란 게 아냐”
법무부의 불법 체류 외국인 농업노동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2일 경기도의 한 농촌 지역 비닐하우스에서 타이(태국) 국적의 농업노동자 2명이 모종용 고구마에 물을 주고 있다. 김기성 기자
들판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물을 댄 논에도, 씨감자를 묻어야 할 밭이랑에도 사람은 그림자도 안 비치고 뿌연 황사만 자욱했다. 읍내로 나가는 마을 앞 도로에는 늙은 농부가 탄 낡은 경운기만 “탈탈탈탈”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지나갔다.
지난 12일 찾은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대신리의 한 농장도 인적이 드물긴 마찬가지였다. 고구마 출하를 앞두고 분주해야 할 농산물 창고에는 적막만 흘렀다. 포장을 위해 쉼 없이 돌아가야 할 고구마 선별작업장의 컨베이어벨트에선 흙먼지만 뽀얗게 묻어났다. 땅콩과 감자를 심어야 할 창고 근처 밭도 잡초들만 수북이 머리를 내밀었고, 고구마 싹을 틔우는 비닐하우스도 사람 하나 없이 썰렁했다.
이곳은 두어달 전만 해도 외국인 농업노동자들로 시끌벅적했던 곳이다. 그러나 최근 법무부의 불법체류 외국인 농업노동자 단속반이 훑고 간 뒤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던 숙소 곳곳에는 주인 잃은 옷가지와 이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날 숙소 주변에서 점퍼 차림의 기자를 맞닥뜨린 한 타이(태국)인 노동자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잰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말을 걸려고 다가서자 “나 불법 아니에요,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도둑질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껏 가슴 졸이며 고구마 심고 감자 캐고 그래 왔습니다. 법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지만, 유독 농민들을 향해 이렇게까지 칼을 휘두르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노동자 귀국 비용 쥐여주고, 야산에 올랐다
마을 안 이곳저곳으로 기자를 안내하던 고구마 농장 주인 고석재(57)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농과대를 졸업하고 객지에서 사업을 하던 고씨는 10여년 전 고향에 돌아와 5만평 남짓한 논밭을 일구며 부농의 꿈을 꿨다. 새 종자도 개발해보고 시설도 늘렸다. 마을에선 ‘토박이 대농’으로 불렸다.
고씨의 꿈은 지난 2월1일 산산조각이 났다. 승합차 2대에 나눠 탄 법무부 직원 10여명이 갑자기 농장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외국인 농업노동자들이 머물던 농장 숙소를 급습했다. 이날 12명의 농업노동자가 불법체류 혐의로 붙들려 갔다. 고씨가 “농번기에 이러면 다 죽는다”고 통사정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붙들린 사람들은 외국인보호소로 보내졌다.
고씨는 엿새 뒤 경기도 화성의 외국인보호소를 찾아갔다. 한여름 땡볕에서 농사를 도와줬던 이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내게 돼 미안하다”며 한 사람당 70만원씩의 귀국 비용을 쥐여준 뒤 농장으로 돌아왔다.
지난 12일 오후 외국인 농업노동자들이 단속돼 상품으로 출하하지 못한 고구마가 창고에 그대로 쌓여 있다. 김기성 기자
눈물에 탄식만 나왔지만, 벌여놓은 농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농장을 돌려야 했기에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외국인들을 다시 고용했다. 단속을 피해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고구마 선별작업장을 가동했고, 법정공휴일 등 법무부 직원들이 쉬는 날만 골라 ‘숨바꼭질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법무부 단속반은 끈질겼다. 같은 달 22일 고씨의 농장을 새벽에 급습한 법무부 직원들은 3시간 넘게 숙소를 에워싸고 대치하다가 안에 머물던 외국인 노동자 6명을 모두 잡아갔다. 최소 20명이 필요한 농장에서 18명이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 절차를 밟게 됐고, 농장주 고씨는 ‘불법 고용’한 외국인 노동자 한 명당 200만~300만원 안팎의 범칙금을 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어림잡아 5천만원이 넘는 ‘범칙금 폭탄’을 떠안은 것이다.
“별수 있습니까? 유서를 썼죠. 어차피 다 망해 죽어 나자빠지는데 더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고요. 마을 야산에 올라가 목숨을 끊으려던 때, 저를 애타게 찾는 마을 방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가족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도 올라오더라고요.”
농업인력 80~90%가 외국인이지만
고씨가 이날 여러차례 강조한 것은 ‘단속을 해도 상황을 봐가며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손이 부족한 농촌 현실을 외면한 무차별 단속으로 농심이 썩어들어가고 있다. 대책도 대안도 없는 농업노동자에 대한 실적 올리기 식 단속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했다.
“불법을 봐달라는 게 아닙니다. 대책을 마련해달라는 겁니다. 농민 목소리에 귀를 열지 않으면 나라의 근간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의 한 농장주인 고석재씨가 일손이 없어 멈춰 선 고구마 상품 선별작업용 컨베이어벨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 농장에는 외국인 농업노동자 20명이 있었으나, 지난 2월 법무부의 두 차례 단속으로 18명이 강제 출국당했다. 김기성 기자
외국인 노동자 단속으로 날벼락을 맞은 것은 고씨뿐만이 아니다. 여주지역에서 지난 2~3월 단속을 당한 농가는 30곳이 넘는다. 대부분 고구마와 땅콩, 감자 등 밭농사를 짓는 농민들이다. 농기계를 주로 사용하는 논농사에 견줘 상대적으로 수작업이 많이 필요한 일들이다. 고씨는 “품앗이로 돌아가던 농업구조는 완전히 변했다"며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농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된 지 오래"라고 했다.
나날이 강도를 더해가는 단속에 대한 공포에 여주지역 농민들은 ‘농업인력수급 여주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여주시농민회를 비롯해 여주시친환경농업인연합회, 여주시고구마연합회, 여주친환경출하회, 여주시인삼연구회 8개 농민·농업단체가 참여했다. 지난달 17일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더는 농민들을 범죄자로 만들지 말고 농번기 단속을 유예하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남정현 여주시 친환경출하회 사무국장은 <한겨레>에 “농업이 100% 기계화·자동화되지 않는 이상, 불법체류 외국인이라도 고용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마구잡이식 단속은 농촌을 한층 피폐하게 만들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국내 농업인력의 80~90%가 외국인들로 충원되고 있다. 그러나 취업비자 근로자와 계절근로자 등 합법적인 농업인력은 10% 미만으로 추산된다. 김영준 농업인력수급 여주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계절근로자 등 합법적 경로를 밟는 농업노동자는 상시 근로가 가능한 축산업과 대규모 시설원예 농가에서 주로 일하기 때문에, 농번기에 집약적으로 일할 노동력이 필요한 다수 농가들에겐 합법 노동자를 쓰는 것은 언감생심”이라고 했다.
“텅 빈 들판에서 울고 있는 농민들을 보라.” 지난달 17일 여주시청에서 열린 농민 집회에서 김남익 여주시고구마연합회장이 한 말이다.
김기성 기자 player00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