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세했던 부산 북강서을 대상초등학교 합동연설회장. 김영동 기자
“지역 대결의 정치가 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지역구도 때문에 영남 대통령이 호남에 가면 구 의원도 안 되고, 호남의 대통령은 이 부산에 오면 구 의원도 되지 않는 이런 정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치가, 나라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영남과 호남의 반쪽 지도자가 아니라, 전 국민을 하나로 묶는 통합과 화합의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2000년 4월2일, 부산 강서구 대저1동 강서구청 근처 대상초등학교에는 수천명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당시 16대 총선에 나선 부산 북강서을 후보자의 합동연설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지역주의 타파’를 소리 높여 외치며 지지를 호소했다. 지역주의 타파는 그의 필생의 과업이었다.
하지만 상대 후보는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허태열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살림살이가 전보다 좋아졌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시다면 손 한번 들어봐달라”고 한 뒤, 누군가 손을 들자 “혹시 전라도에서 온 거 아니냐”고 비아냥댔다. ‘노무현이 민주당의 차기 대권 후보가 되어도 민주당을 ‘호남당’이라고 미워하시겠습니까’라고 쓴 노 후보의 선거 공보물에 대해서도 허 후보는 “전라도 사람이 주축인 민주당에서 영남 사람이 대권 주자가 된다는 게 웃긴 소리 아니냐”고 비웃었다. 이 선거에서 부산 시민들은 망국적 지역감정을 악용한 허 후보에게 승리를 선물했다. 선거 초반 앞서가던 노 후보는 17.5%포인트 차로 크게 졌다. 부산에서만 세번째 낙선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90년 5월 부산 중구 국제시장 앞 도로에서 3당 합당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모습(사진 속 사진)과 지난 2019년 5월17일 같은 장소를 찍은 모습.
그러나 이 패배는 ‘대통령 노무현’의 시작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서울 종로를 버리고 당시 정치적 사지였던 부산에 출마해 장렬히 패배한 노 전 대통령에게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노 전 대통령을 두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민들도 하나둘 늘어났다. 인터넷에선 자발적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른바 ‘노사모’가 탄생했다.
아직도 부산에선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가 만만치 않지만, 노무현이 세번째 떨어졌던 19년 전과 비교하면 상전이 벽해가 됐다. 지역주의는 꾸준히 옅어지고 있다. 지난 17일 만난 대저1동 주민 정아무개(68)씨는 “10년 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미안했다. 합동 연설회에서 ‘통합과 화합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그의 말이 계속 생각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선거에서 당이 아니라, 후보를 제대로 보고 투표하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늘어나면 지역주의가 사라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대저2동의 한 마을에서 만난 이아무개(65)씨도 “16대 총선 당시 옆집 아저씨 같은 소탈한 모습과 진정성에 반해 선거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다. 당시 마을버스가 다니지 않아 불편했는데 낙선한 뒤에도 ‘마을버스는 걱정하지 마이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마을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낙선했는데도 자기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그런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노 전 대통령이 지역구도 해소를 위해 나선 것은 1990년으로 거슬러간다.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던 그를 1988년 13대 총선에서 끌어들여 부산의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1990년 전격적으로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했다. 당시 그는 합당 결의 대회장에서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쳤지만 김영삼은 대답이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뒤 민주당을 창당해 1992년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는 군사정권의 ‘말류’였던 허삼수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졌고, 3년 뒤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도전해 문정수 민자당 후보에게 또다시 졌다.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하면서 부산은 오랜 ‘야도’에서 ‘여도’로 바뀌었고,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 등 보수 정당의 텃밭이 됐다.
그러나 3번의 낙선을 포함한 노 전 대통령의 줄기찬 도전은 부산의 지역주의에 작은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2004년 총선에서 부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열린우리당(현재의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총선에서 2석, 2016년 총선에서 5석을 민주당 계열 정당이 차지했다. 지난해 보궐선거 당선자 1명까지 더하면 6석이다. 현재 부산의 지역구 의원 18명 중 3분의 1이 민주당이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선 더욱 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만년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이 23년 만에 부산의 지방정부를 교체했다. 오거돈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부산시장에 당선됐고 부산시 의원 47명 가운데 41명을 민주당이 차지했다. 부산의 기초단체장 16명 가운데 13명도 민주당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지역주의 타파를 향한 전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정치에서 지역주의가 사라지지 않았다. 지역주의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정치권 전체가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도 “민주당이 2016년 총선 때 부산 등 영남에서 8석을 얻고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영남에서 압승한 것은 노 전 대통령이 뿌린 씨앗 덕분이다. 앞으로 이 씨앗이 더 큰 열매를 거두려면 정당을 뛰어넘어 더 공정한 인사와 더 공정한 선거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떠났지만, 부산에선 제2, 제3의 노무현들이 태어나고 있다.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노 전 대통령처럼 안정된 서울을 버리고 부산으로 와서 2012년 총선에 도전했다가 낙선했다. 그러나 4년 뒤 그는 결국 부산에서 당선했다. 그는 “그분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거두고 있다. 돌아가시고 나서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그래서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 통합의 정치를 이어 달려야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사무실이 있던 건물. 김명진 기자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그만두고 1978년 부산으로 내려와 돈 잘 버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노 전 대통령을 인권 변호사로 만든 것은 부림사건이다. 부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부산지역 학생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기획수사를 벌여 고문과 구타를 일삼아 받아낸 진술서를 법원에 제출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19명을 구속한 일을 말한다.
부림사건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변호사 사무실은 동아대 부민캠퍼스 후문 앞 골목길 3층 건물의 3층(200㎡)이다. 1980년 임대했는데 1982년 일곱살 아래의 문재인 대통령이 이 사무실에 합류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동고동락하며 부산의 대표적 인권·노동 변호사로 활동했다. 1982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가 2년 뒤 사무장을 지냈던 최병두(69)씨는 “노 전 대통령과 7년 동안 함께 일했는데 업무가 서툴다고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고 항상 잘했다고 칭찬했어요. 기억력이 놀라웠죠”라고 추억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박인영 부산시의장은 “노무현의 가치는 지역주의 탈피뿐만 아니라 탈권위주의와 남북관계 개선, 서민 중심 경제 등 여러 가지다. 각자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강세현 신라대 교수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노 전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도망가지 않고 도로에 드러눕는 것을 보고 놀랐다. 노무현 정신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사랑, 그리고 실천이라고 본다. 부산에서도 집권이나 출세의 도구로 노무현 정신을 이용한다면 시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김광수 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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