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5·18연구자로 꼽히는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동생의 주검을 본 뒤 암매장 의혹을 파헤치는 데 애를 써왔다.
굴착기로 파헤쳐놓은 흙더미 속에서 주검들이 보였다. 11구였다. 흰색 페인트로 1번이라고 적힌 주검에 눈길이 갔다. 바지와 손수건을 보고 동생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동생의 주검이 전투교육병과사령부 안 101사격장에서 가매장된 채 발견된 1980년 6월2일 이후 정수만(70) 전 5·18유족회장의 삶도 달라졌다. 동생 지영(당시 31살)씨는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분노해 거리로 나갔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동생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던 정씨도 이듬해 5월 광주 망월동 옛 5·18묘지에서 추모제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8개월 실형을 살았다. 잔인한 세월이었다.
5·18 진상 규명을 위해 싸운 정씨가 유독 암매장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동생의 주검을 목격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정씨는 “가족들이 이곳저곳 수소문하고 다니지 않았으면 동생의 주검조차 수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5·18행불자 가운데 76명은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1986년께부터 암매장 의혹을 추적한 그는 제보와 자체 조사를 통해 89건에 이르는 암매장 의혹을 파일로 정리했다. 정씨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암매장 제보도 10건이 넘는다”고 했다.
민간 5·18연구자로 꼽히는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이 자택에서 관련 자료를 검색하고 있다.
암매장지로 가장 많은 제보가 이뤄진 지역은 옛 광주교도소(11건)와 전남 화순 너릿재 일대(8건)다. 5·18기념재단이 이 두곳에 대한 암매장 주검 발굴에 나섰지만 주검을 발견하지 못했다.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던 송암동 분뇨처리장(5건)과 7·11공수여단 부대가 투입돼 주둔했던 주남마을(4건), 옛 군부대인 상무대(4건) 등도 중복제보가 있었던 지역들이다. 이 밖에 북구 일곡동 야산(3건)과 성남·송정비행장(3건)도 암매장지로 거론됐다.
땅속에 묻힌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는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송암동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면서 수차례 찾아가 주민들과 친분을 쌓은 뒤 증언을 얻기도 했다. 혹시나 행불자들이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됐을지 몰라 전남지역 정신병원 입원자들을 전수조사하기도 했다.
가장 잊히지 않는 암매장 의혹 사건은 일곡동 야산 제보 건이다. 정씨는 “1990년대였는데 일곡동 야산에 다섯구의 시신이 있었다는 제보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고 회상했다. 반상회에서 만난 노아무개씨의 제보인데 군인들의 동선과 행동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제보만 듣고 발굴을 할 수 없던 그는 아직도 그 장소가 눈에 어른거린다.
1980년 5월 전남 목포 차량 시위 때 사망한 이의 시신 검시 관련 기록. 그러나 그의 무덤은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졌고 주검은 사라진 상태다.
군부대 내 암매장 의혹도 앞으로 밝혀져야 할 사건이다. 1996년 정씨는 강원도 한 운전기사라고 밝힌 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운전기사는 “내가 군인 2명을 태웠는데 5·18 당시 죽은 사람을 자기 부대에 묻었다고 하더라”고 제보했다. 그날 오후 승용차를 빌려 타고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로 갔던 정씨는 깜짝 놀랐다. “5·18 때 광주에 투입됐던 11공수여단의 부대가 있던 곳이었어요.” 이후 부대를 출입하던 양돈업자를 수소문해 만났지만, “어떻게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정씨는 “5·18 주검을 영구히 은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군부대”라며 “비행장 관련 제보도 있었다. 군부대에 대한 조사가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전남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해남군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 해남군 북평면 우슬재 전투 때 시위에 가담했던 방위병 2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2명이 아니라 3명이 묻혔다는 제보를 받기도 했다. 정씨는 “나주에 거주하는 박아무개씨가 ‘동네 이장하고 해남 군부대에서 세번째 관에서 주검을 수습했다’는 진술을 받았다”며 “나중에 1988년 국회 청문회 때 해당 군부대에서 묘지가 있던 옹벽이 디귿자로 파헤쳐졌다고 하더라”고 했다. 5·18 학살이 논란이 되자 군부대 내 암매장된 시신을 어디로 옮긴 것 같다는 얘기다.
11공수 한 대대장의 검찰 조서 기록. 시민들의 소지품을 회수한 뒤 주검을 가매장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광주시는 그동안 암매장된 곳으로 신고된 47곳 가운데 몇 곳을 발굴했지만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 1980년 5월 이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거나 도로가 건설되는 등 지형이 급속하게 변해버린 탓이다. 암매장 발굴이 성공하려면 당시 군인들의 결정적 제보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씨는 “암매장된 시신의 발굴은 주검을 매장한 군인들이 해당 지역을 딱 짚어주지 않으면 발굴하기 힘들다”며 “당시 군에선 암매장 지역과 명단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제로 김아무개 11공수여단 중령은 1995년 검찰 조사에서 “소지품 회수 뒤 가매장하고 매장 지역에 대해 상황보고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엔 진상규명 과정에서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내용이 진실에 부합하면 처벌하지 않거나 감형할 것을 관계기관에 건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정씨는 “5·18 때 왔던 군인들의 제보를 끌어낼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씨는 암매장 의혹뿐 아니라 집단발포 명령 등 5·18 진상 규명을 위해 1994년부터 5·18 자료를 광범위하게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놓았다. 특전사 전투상보, 2군 상황일지 등 군 자료와 응급일지 및 검시 자료, 당사자 증언 청취 자료 등 목차 목록만도 7만5천건이 넘는다. 5·18 관련자의 이름을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하면 관련 자료들이 주르륵 나온다. 정씨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터놓고 5·18의 마지막 매듭을 풀어야 한다. 39년이 지났는데 뼈라도 찾아줘야 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민간 5·18연구자로 꼽히는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이 광주 주남마을 민간인 학살지를 둘러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