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북접사업회와 시민 등이 26일 보은 민회 126돌 행사를 재연하고 있다. 동학혁명 북접사업회 제공
동학혁명 북접사업회는 26일 충북 보은 뱃들공원 등에서 동학혁명 126돌 보은 민회를 열었다. 이날은 동학 혁명 한 해 전인 1893년 음력 3월 11일 보은 민회를 연 지 꼭 126돌이 되는 날(양력)이다. 사업회 회원과 시민 등은 꽃상여·만장 등을 앞세우고 거리 행진을 했다. 동학과 시민운동 등을 주제로 시민 자유발언 등의 행사가 이어졌다. 조정미 동학혁명 북접사업회 사무국장은 “126돌을 맞은 보은 민회는 평화롭게 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회로 세계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한을 안고 희생된 동학군과 백성 등의 넋을 기리려고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동학혁명 북접사업회와 시민 등이 26일 보은읍내를 행진하며 한을 안고 숨진 동학군 등의 넋을 달래고 있다. 동학혁명 북접사업회 제공
충북 보은은 동학혁명의 처음과 끝이었다. 126년 전 이날 전국의 동학 교도와 농민 등이 보은으로 몰려들었다. 교조 최시형 선생의 신원과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위한 모임으로, ‘보은 민회’ 혹은 ‘보은 취회’라 불렸다. 보은 동학혁명 기념사업을 해 온 박달한씨는 “당시 줄잡아 2만~3만명의 백성이 이곳에 모였다. 8만여명이 모였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보은은 동학 본부라 할 수 있는 대도소가 설치돼 있었고, 지리적으로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과 경기를 잇는 요지여서 사람이 모이기 좋았다”고 밝혔다.
보은은 동학군이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1894년 11월 우금치(충남 공주)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남·북접으로 나뉘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군은 전라지역에서 패했으며, 이후 손병희 선생이 이끄는 북접군은 소백산맥을 타고 무주, 영동, 옥천을 거쳐 보은 북실에 다다랐다. 하지만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 패해 이곳에서 동학군 2600여명이 최후를 맞았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