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인(앞줄 맨 왼쪽) 충북대 러시아언어문화학과 학생과 청주 오송에 사는 사할린 한인들. 강씨 등은 사할린 한인의 삶을 추적한 책 <그 섬, 잊혀진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를 펴냈다.충북대 러시아언어문화학과 제공
“우리의 역사를 들어주고, 기억하고, 다시 이런 비극이 반복하지 않게 해달라. 나는 한국인이다.”
15일 오후 충북 청주 오송의 한 경로당에 70~80대 어르신 10여명이 모여 조촐하지만 뜻있는 그들만의 광복절을 기념했다. 영주 귀국이란 이름으로 고국 땅을 밟은 사할린 한인이다. 2008년 81명이 이 마을에 뿌리 내렸지만 지금은 64명으로 줄었다. 김인자(72)씨는 “우리에게 광복절은 남다르다. 광복과 귀국을 손꼽아 기다리던 부모를 곁에서 보며 자랐다. 오늘 먼저 간 부모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말했다.
사할린 한인은 일본 강점기에 강제노역 등으로 끌려간 1세대 부모를 둔 2세들로 정부의 영주 귀국 정책에 따라 귀국해 충남·경기·강원 등 전국 20여 곳에 분산해 살고 있다. 부부 기준 다달이 100만원 남짓한 정부 지원으로 빠듯하게 생활한다.
사할린 한인의 인생 역정을 좇은 <그 섬, 잊혀진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 표지. 충북대 러시아언어문화학과 제공
충북대 러시아언어문화학과 4학년 강지인·강호수·김주연·천인화(23), 2학년 이동우(22)씨 등이 사할린 한인들의 인생 역정을 좇은 <그 섬, 잊혀진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도서출판 영원애드)를 최근 내놨다. 이들은 지난 4월부터 청주 오송에 뿌리 내린 사할린 한인 가정 11곳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그들의 품에서 나온 빛바랜 사진도 함께 담았다. 강지인씨는 “일본 강점기에 강제노역으로 끌려간 부모와 그들의 자녀인 이들은 언젠가 귀국할 그 날을 위해 무국적 신분을 마다치 않은 참 한국인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들의 역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충북대 러시아언어문화학과 학생들이 청주 오송에 사는 사할린 한인을 찾아 인터뷰하고 있다. 충북대 러시아언어문화학과 제공
책은 해방 전후 사할린 한인의 처절한 삶을 그대로 담았다. 김영수(70)·강해자(74) 부부는 “아버지는 사할린 탄광에 징용으로 끌려왔다. 일제가 ‘가미카제’(자살공격)를 위해 큰형(16살)을 징집하려 할 때 가족이 함께 달아났고, 이후 도피 생활이 이어졌다”고 회상했다. 박만조(79)·여금반(72) 부부는 “어린 시절 밤마다 일제의 총칼을 피해 석탄을 주워 생계를 이었다. 일제에 대한 분노조차 사치였다. 당장 살 돈이 필요했다”고 했다.
남과 북으로 갈리기도 했다. 조구미(78)씨는 해방 뒤 귀국이 미뤄지면서 먼저 북으로 간 언니 둘의 생사를 지금껏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조국에 대한 한도 담겨 있다. 민태룡(77)씨는 “해방 뒤 곧바로 한국에 가려고 무국적으로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우릴 받아주지 않았고, 러시아는 우릴 무시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김종순(70)씨는 “부모들이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국을 부모의 한을 풀려고 우리가 대신 왔다. 우리도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푸념했다.
이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김인자(72)씨는 “부모와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고, 지금처럼 살다가, 끝내 갔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우리 같은 불행한 삶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강씨는 “사할린 한인의 생활이 너무 열악하다. 이들의 지난 삶을 알리고 경험도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한다”고 했다.
오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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