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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 앞서 사라진 7살 아들, 뼛조각 하나라도 찾았으면

등록 2018-05-16 15:41수정 2018-05-16 21:30

[5·18 그날의 진실] ④암매장
광주역앞 실종된 7살 아들 찾는 이귀복씨
유해발굴지 100여곳 헤맸어도 못찾아
“유골도 없는 76명 행불자…암매장 의심”
13일 광주 5·18민주묘지 행방불명자묘역에서 이귀복(81)씨가 실종한 아들의 사진이 실린 <5·18민중항쟁비망록>을 보여주고 있다.
13일 광주 5·18민주묘지 행방불명자묘역에서 이귀복(81)씨가 실종한 아들의 사진이 실린 <5·18민중항쟁비망록>을 보여주고 있다.

“뼛조각 하나라도 찾아 고이 묻어주고 싶어요.”

13일 광주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행방불명자묘역을 찾은 이귀복(81)씨가 아들의 묘비 앞에서 슬픔을 감추려는 듯 ‘후~우’하고 숨을 골랐다. 구부정한 허리로 꽃을 바치고 부러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마치 살아있는 아들한테 들른 아버지의 목소리 같았다.

“잘 있었냐? 이놈아 아부지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하냐.” “인자 우리가 만날 날이 머지않은 거 같다. 이번에 만나면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잉. 그때 지켜주지 못해서 아부지가 두고두고 미안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아들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눈이 촉촉해진 그가 최근 미수습자를 찾기 위해 선체를 바로 세운 세월호로 화제를 이어갔다.

그는 “희생자 모두가 짠하지만(불쌍하지만) 미수습자는 남일같지 않혀. 가족을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서럽고 아픈지 우리가 너무 잘 알제. 꼭 찾아야 쓸 것인디. 앞으로 5·18 행방불명자를 찾는데도 애써주면 좋겠는디”라고 말했다.

그는 80년 5월 실종한 아들을 찾아 광주 일원뿐 아니라 전남 영광, 전북 고창, 경기 파주 등 유해발굴지 100여곳을 헤맸다. 하지만 아들의 흔적조차 찾지 못해 번번이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는 “다닐 만큼 다녀봤어. 실종자는 많은디 여태껏 암매장 발굴로 찾아낸 유골은 없어. 조직적인 대규모 암매장이 있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제”라고 강조했다.

5·18을 전후해 행방불명자로 신고된 이는 242명이지만, 심사를 거쳐 관련자로 인정된 이는 82명에 그친다. 2002년 디엔에이 감식으로 5·18 희생자 중 신원이 밝혀지지 않는 ‘무명열사’ 묘지 11구를 파묘해 디엔에이 감식으로 6명의 신원이 밝혀졌다. 이 가운데 3명은 부엉산과 주남마을 인근에서 발견된 주검들이다. 하지만 지금도 행불자로 인정된 76명의 주검은 어디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의 아들 창현(7)군은 실종 당시 입학한 지 겨우 두 달이 지난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는 “활달한 개구쟁이였어. 뭔 소리만 나도 귀를 쫑긋 세우고 그랐제. 유달리 호기심이 많았어”라고 회고했다.

미장일은 하는 이씨는 1980년 5월 전남 완도에서 주택을 짓는 중이었다. 광주 양동시장 부근 집에는 부인과 3남매가 남아 있었다. 그는 광주에서 난리가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막연히 잘 있을 거라고만 믿었다.

항쟁이 끝나고 광주에 돌아온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창현이 5월20일 2㎞쯤 떨어진 광주역 쪽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이 목격된 뒤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부인은 전남도청에 찾으러 갔다가 계엄군의 엄포에 놀라서 발길을 돌렸다. 창현보다 나이 어린 두 남매를 맡겨두고 찾아 나설 형편도 못되었다.

이귀복 전 5·18 행방불명자회 회장이 13일 5·18민주묘지의 유영봉안소에 있는 아들의 사진을 가르키고 있다.
이귀복 전 5·18 행방불명자회 회장이 13일 5·18민주묘지의 유영봉안소에 있는 아들의 사진을 가르키고 있다.
그는 아들을 찾아 근처 야산과 천변, 병원 등 있을 만한 곳들을 다 뒤졌지만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낙담한 그는 80년대 초반 처지가 비슷한 이들과 함께 5·18행방불명자회를 만들었다. 양동시장 부근 여관방 한 칸을 빌려 사무실을 내고, 집에 있던 시계와 이불을 챙겨가 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5월 유족회가 <광주민중항쟁비망록>을 발간했을 때와 2002년 5월 옛묘역의 무연고 묘지 11기를 발굴했을 때는 금방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아이의 사진과 주검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의 출처를 찾지 못하거나, 유전자 검사 결과가 달라서 갑절의 실망을 맛봐야 했다. 이런 안타까운 과정을 거친 끝에 그는 1994년 어렵사리 아들의 행방불명을 인정받았다.

그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느라 그때 제대로 못 찾은 게 한이여. 인정을 받아도 유골을 못찾고 있으니 사람 환장할 노릇이제”라고 한숨지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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