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면중 김해인(왼쪽)·김진형(오른쪽)양이 김옥남 할머니를 인터뷰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괴산 송면중 제공
“노인 한 명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아프리카 격언이다. 아프리카의 지성 함바테 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도 인용했다. 저마다 걸어온 인생의 넓이와 깊이가 도서관 장서에 버금간다는 말이다.
충북 괴산 송면중 학생들이 도서관 같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소녀와 할머니의 공기놀이>다. 시간 여행을 통해 소녀가 된 할머니를 지금의 소녀가 공기놀이하듯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오롯이 녹아 있다.
전교생 30명 작은 학교 학생들은 학교 주변 이웃의 어르신들을 찾아 나섰다. 지난 1년 동안 진행한 ‘위대한 평민 프로젝트’(위평프)였다. 학교와 사회가 소통하고, 학생들은 사회·사람·사고의 폭을 넓히고, 지역은 사람 책에서 나온 역사를 가지려는 뜻을 담았다.
열 다섯살 안팎의 학생들이 산전수전, 파란만장, 간난신고를 거친 어르신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학생들은 주저했다. “꽃집에 있는 꽃만 예쁜 게 아니라 들판에 피었다 지는 꽃도 얼마나 예쁘니. 우리가 그 꽃을, 그분들의 삶을 들여다봐 주고, 기억해주고, 박수해 드리자.”
송면중 박유정(왼쪽)·이가람(오른쪽) 학생이 박온섭(가운데) 할아버지를 인터뷰하면서 라면을 나눠 먹고 있다. 송면중 제공
김명희 ‘위평프’ 지도교사의 말에 학생들은 힘을 냈다. 그리고 그들은 영리했다. 작가, 기자처럼 인터뷰하기보다 여느 손자·손녀가 되기로 했다. 초코빵과 라면을 나누며 벽을 허물었고, 겨드랑이로 파고들며 살갑게 다가갔다.
“내 얘기가 무슨 전기야? 할 말 없어”, “다른 사람 알아봐”, “부끄럽구먼”…. 손사래를 치던 이들도 입을 열었다. 다른 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한 번 말문이 트이자 손녀·손자 같은 학생들의 무릎을 당기며 이야기를 이었고, 학생들은 눈과 귀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어르신 하나하나의 삶은 주제를 분류한 도서관이었다.
“아버지 저도 학교 가고 싶어요.”
“농사일이 너무 바빠 보내줄 수 없다. 미안하다.”
“가고 싶은데….”
삼송리 조간난(82) 할머니는 못 배운 한을 이야기했다. 공기놀이를 더 하고 싶었지만 학교 간다며 돌아선 친구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했다. 조 할머니를 만난 1학년 정윤서양은 “힘겨운 삶을 잘 이겨낸 할머니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별한 삶을 지닌 할머니가 자신을 더 특별하게 여겼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송면리 양재봉(79)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회상했다. 일제에 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옷장에 숨긴 일이며, 한국전쟁 때 솔가지로 가린 구덩이에서 살던 일을 떠올렸다. 양 할머니는 “어머니 덕에 바로 자랐지만,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한 것은 후회스럽다”고 했다.
3학년 차용준군이 삼고초려해 만난 이문숙(62)씨는 서울에서 카페를 운영하다 귀촌한 뒤 유기견을 돌보는 이야기를 했다. 차군은 “성당 착한 할머니로만 알았는데 할머니의 인생은 작은 역사였다”고 했다.
학생들의 구술에 김 교사가 동행하기도 했다. 김 교사는 학생들과 다른 눈으로 어르신을 봤다. 그는 “남북 분단의 질곡 속에서 집안이 풍비박산해 고초를 겪은 박온섭 어르신이 북에 갔던 벽초 홍명희가 이곳 송면에 와서 사람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율했다”고 밝혔다.
괴산 송면중 전교생 30명이 펴낸 이웃 어르신 전기문 <소녀와 할머니의 공기놀이>.
학교는 책 400권을 발행했다. 학생들은 이야기를 나눠 준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 설 선물로 책을 건넸다.
김상열 이 학교 교장은 “책을 만들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어르신을 대하고, 우리 마을에 대한 자긍심도 생겼다”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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