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정년 맞은 전남대 건축학부 천득염 교수
“소쇄원에 가시거든 반드시 계곡으로 내려서서 감상해보세요. 원림(인공이 절제되고 자연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조경 공간)의 높낮이 덕분에 빼어난 공간감을 느낄 수 있지요.”
천득염(65]) 전남대 건축학부 교수가 정년을 앞두고 30여년 동안 연구를 정리한 학술서 <은일과 사유의 공간 소쇄원>을 펴냈다. 최근 그를 만나 소쇄원의 건축학적·인문학적 가치를 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소쇄원을 ‘조선 최고의 원림’, ‘동양 건축의 백미’로 꼽았다.
건축학도 시절 스스로 ‘알리미’ 약속
박사후과정부터 30년 연구 증보판
‘은일과 사유의 공간 소쇄원’ 펴내 “조선 최고·동양 건축 백미” 예찬
누리집 열어 알리고 연구모임 꾸려
“앞으론 ‘치유의 정원’으로 재조명” “흔히 건축을 하나의 개체 또는 물리적 공간으로만 여겨요. 서양의 건축은 그래서 웅장하고 화려하죠. 반면 동양의 건축은 근본적으로 배경과 함께 있어요. 그 배경이 원림이에요. 소쇄원의 건물은 조촐하고 소담하고 조야하나 주변 원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훨씬 더 큰 규모(스케일)가 되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소쇄원이 동양 건축의 백미이자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그가 최근 펴낸 <은일과…>에는 이런 평가를 뒷받침할 논거들이 담겼다. 이 책은 1999년 냈던 개론서 <한국의 명원 소쇄원>을 17년 만에 다시 엮은 증보판이다. 소쇄원의 구성요소와 공간체계를 중심으로 조영 배경과 변화 과정, 문헌 자료와 연구 성과 등을 두루 다뤘다. 특히 500년 전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1503~57)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당시 사회상, 이후 가계도를 정리했다. 또 이곳을 주유했던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우암 송시열 등 기라성 같은 당대 문인들의 면면을 일화와 시문으로 추가했다. 더불어 <소쇄원도>(1755년)를 비롯해 그림·도면·사진 300여장을 곁들여 원림의 정취와 변모를 실감 나게 전달했다.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민간 원림이다. 명승 40호로 대봉대와 광풍각, 제월당 등 정자들이 남아 있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의 제자였던 양산보가 기묘사화(1519년)로 스승이 죽자 낙향한 뒤 1530년대에 짓기 시작해 손자대에 완성했다. ‘물이 맑고, 시원하며 깨끗한 원림’이라는 소쇄원(?灑園) 이름대로, 실제 공간에 들어서면 속세를 떠난 느낌마저 든다. 1548년 하서 김인후가 48영(詠·시), 1696년 방암 양경지가 30영의 연작시를 지을 정도로 경관이 아름답다. 송순, 정철, 기대승 등 16세기 호남 사림들이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시가를 창작했던 장소였다.
그가 유독 소쇄원 연구에 30년간 매달린 이유가 궁금했다. 그가 소쇄원을 처음 ‘발견’한 것은 70년대 후반이었다. 젊은 건축학도였던 그는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원림의 신비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짙은 푸르름이 깔린 소쇄원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어떨떨했어요. 산 위에서 흘러내린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해 정원 가운데로 흘러갔어요. 온갖 나무와 화초, 적절한 위치에 적당한 크기로 자리한 건축물, 안과 밖을 경계하는 담장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죠.”
그는 돌아와 자료를 뒤적였지만 조경학자 정동오 전 전남대 교수의 논문 몇편을 빼고는 소쇄원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스스로 소명의식을 갖고 뭔가 하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전공에 몰두하느라 한동안 관심을 두지 못했다. 교수가 된 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잊고 있었다”는 자책감을 느꼈다. 90년대 초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관이나 자연이 우리의 모태이고, 결국은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지도교수들도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찾아 사유하고 천착하기를 권유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원림과 불탑’이 필생의 연구 주제로 정해졌다.
그는 속죄하는 심정으로 소쇄원에 매달렸다. 4~5년 동안 문헌을 수집하고 자료를 정리해서 개론서를 냈다. 책을 내고 나자 혼자만 알고 있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10여년 전부터 누리집 ‘한국의 최고 원림 소쇄원’(soswaewon.co.kr)을 열어 원본 자료를 모두 올렸다. 문헌·조경·건축 분야 전문가 10여명으로 짜인 ‘소쇄원 연구모임’을 결성해 3년째 이끌고 있기도 하다. 한 해 두 차례 소쇄원에서 학술 강연과 문화해설에도 나서고 있다.
그의 소쇄원 예찬은 끝없이 이어졌다. “바라보는 대상으로서도 아름답지만, 그 안에서 주변 경관을 가까이, 좀더 멀리, 아주 멀리, 차츰 시야를 넓혀가야만 참모습을 느낄 수 있어요. 이번에 수록한 소쇄원 30영에서도 1400평(4620㎡)도 안 되는 내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옹정봉, 한벽산 등을 포함하는 4만여평(13만여㎡)의 대자연으로 경점을 확대했지요.” 그는 이어 과거엔 은일의 공간이었던 소쇄원을 이제 햇살·바람·소리 등을 눈과 귀로 감상하며 마음을 열어가는 ‘치유의 정원’으로 재조명해야 한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그는 문화재위원회 건축분과위원과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전남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백제계 석탑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논문 120여편을 발표했다.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전탑>, <백제계 석탑 연구>, <한국의 건축 문화재>(전남편), <광주 건축사>,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문화> 등 저서 8권을 냈다.
그는 앞으로 “소쇄원을 연구하는 후학들을 돕겠다. 100년 넘게 한센인들의 삶터였던 고흥 소록도의 건축물을 사진과 도면으로 기록하는 작업도 하려 한다. 미얀마·네팔·티베트 등의 불탑 특성을 정리할 계획을 갖고 있어 늘 마음이 바쁘다”고 말했다.
안관옥 선임기자 okahn@hani.co.kr
천득염 전남대 건축학부 교수. 사진 전남대 제공
박사후과정부터 30년 연구 증보판
‘은일과 사유의 공간 소쇄원’ 펴내 “조선 최고·동양 건축 백미” 예찬
누리집 열어 알리고 연구모임 꾸려
“앞으론 ‘치유의 정원’으로 재조명” “흔히 건축을 하나의 개체 또는 물리적 공간으로만 여겨요. 서양의 건축은 그래서 웅장하고 화려하죠. 반면 동양의 건축은 근본적으로 배경과 함께 있어요. 그 배경이 원림이에요. 소쇄원의 건물은 조촐하고 소담하고 조야하나 주변 원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훨씬 더 큰 규모(스케일)가 되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소쇄원이 동양 건축의 백미이자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그가 최근 펴낸 <은일과…>에는 이런 평가를 뒷받침할 논거들이 담겼다. 이 책은 1999년 냈던 개론서 <한국의 명원 소쇄원>을 17년 만에 다시 엮은 증보판이다. 소쇄원의 구성요소와 공간체계를 중심으로 조영 배경과 변화 과정, 문헌 자료와 연구 성과 등을 두루 다뤘다. 특히 500년 전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1503~57)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당시 사회상, 이후 가계도를 정리했다. 또 이곳을 주유했던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우암 송시열 등 기라성 같은 당대 문인들의 면면을 일화와 시문으로 추가했다. 더불어 <소쇄원도>(1755년)를 비롯해 그림·도면·사진 300여장을 곁들여 원림의 정취와 변모를 실감 나게 전달했다.
천득염 교수가 전남대 건축학부 제자들과 함께 담양 소쇄원의 원래 구역인 옹정봉, 한벽산 등 주변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소쇄원 종가 제공
천득염 교수는 각 분야 전문가 10여명과 함께 소쇄원 연구모임을 꾸리고 있다. 지난해 담양군의 소쇄원 보수공사를 둘러싸고 부실·오류 논란이 일어나면서 연구모임도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 소쇄원 종가 제공
연재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