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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글씨만 봐도 덜컥”…제천이 아프다

등록 2017-12-28 14:39수정 2017-12-28 21:58

화재 참사 유가족·생존자·소방관 등
불안·초조·불면·죄의식 등 다양한 증세
세월호 유가족 보인 심리 반응과 비슷
충북 제천시 하소로 노블 휘트니스스파 화재 참사 현장 주변의 한 상점에 25일 오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아픈 마음을 같이해 영업을 일시 중단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제천/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충북 제천시 하소로 노블 휘트니스스파 화재 참사 현장 주변의 한 상점에 25일 오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아픈 마음을 같이해 영업을 일시 중단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제천/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딸아이 엄마에게 술이라도 마시라고 해요. 그럼 안주라도 넘길 테니.”

28일 만난 충북 제천 화재 참사 유족 김아무개씨는 안경 너머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다. 옷이며, 얼굴이며 온통 검정 색인데 눈만 빨갛다. 김씨는 화재 당시 고교생 딸을 잃었다. 고3 수험생으로 대학에 합격한 상태였다. “그때 전화를 하면서 눈 앞에서 아이를 보냈어요.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빨간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그는 아내가 걱정이다. “잠을 통 못 자요. 저는 그래도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살지만 아내는 아무것도 못 하고 울기만 해요. 저러다 큰일 날까 걱정이에요.” 김씨는 아내에게 전화했다. “심리 치료 제발 받아라. 그러다 큰일 난다. 제발….”

살아 남은 자 모두, 아프다.

“병실에 누워 있는데 텔레비전을 못 보겠다. 자막 빨간 글씨만 봐도 불안하다. 자꾸 불씨가 생각난다.”

제천제일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 이상화(69)씨다. 이씨는 지난 21일 ‘노블 휘트니스 앤 스파’(옛 두손스포리움) 화재 당시 4층 헬스장에서 손자(15)와 운동을 하고 있었다. 불이 난 것을 알고 대피했다. 헬스 트레이너는 위층으로 대피하라고 했지만 밑으로 내려갔다. “사우나 개장할 때부터 헬스장을 이용해 본능적으로 비상구가 밑 쪽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3층을 지나 2층에 닿으니 이미 연기가 차 올라왔다. 여성들이 몰려 있었다.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 몸 하나 정도 나갈 수 있는 작은 유리창이 있었다. 손자가 문을 열었다. 지상까지 2~3m 정도 됐다. 처음엔 주저주저했지만, 떠밀다시피 하나둘 밖으로 내밀었다. 거의 마지막에 뛰어내린 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 나중에 15명을 구조했다고 했다.

이씨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며 심리적으로 심한 불안 상태에 시달리고 있다. “수면제를 먹어도 2시간이면 잠을 깬다. 죽은 사람들이 자꾸 생각난다. 거의 날마다 운동하고, 사우나 이용했으니 숨진 사람 3분의2는 아는 이들이다. 퇴원한 뒤 조용한 산속으로 가려 한다.”

제천이, 아프다.

13만6천명의 이 소도시는 인구가 13만6천명 정도다. 시 외곽 읍·면 지역을 빼면 참사가 난 하소동 등 동 단위 지역은 그야말로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이번 참사로 29명이 숨지고, 36명이 다쳤다. 유가족 등 직간접적인 관련자만 수백명이 넘는다.

택시 기사 홍귀화씨는 “여긴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 거대한 장례식장이다. 연말이지만 여느 때처럼 송년회하는 이가 거의 없다. 멍하니 나와 소주 한잔하고 들어가는 게 전부다”고 했다. 홍씨는 “어른들이 죄인이다. 비행기가 떨어진 것도 아닌데 스물 아홉명이 숨지다니. 모든 걸 싹 바꿔야 한다. 운전하다가도 눈물이 난다. 손님도 없으니 아예 당분간 쉬자는 기사가 많다”고 했다. 분향소 앞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최성용(57)씨는 “화재 참사 현장에서 다 지켜봤다. 조그만 틈만 있으면 뛰어들어 구하고 싶었다. 희생자 가운데 아는 이도 몇몇 있다. 안타깝고, 미안하고, 허망하다. 당분간 털어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살리지 못한 이도, 아프다.

애써 말을 아끼고 있는 소방관들은 괴롭다. 화재 현장에서 만난 한 소방관은 “소방관을 원망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괴롭다. 구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많이 생각 날 듯하다”고 말했다. 다른 소방관은 “그때 뛰어들어갔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난다. 사람을 피하고 싶다”고 했다.

26일까지 희생자 29명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면서 유가족, 생존자 등의 심리 상담·치료가 시작됐다. 제천시 등은 ‘세월호 트라우마’ 학습을 교훈 삼아 촘촘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국립정신건강센터·국립공주병원·충북 광역·기초건강복지센터·제천보건소 등은 지난 22일부터 재난 심리회복 지원단을 꾸려 운영하고 있다. 심리 치료 정보를 지원하고, 상담·치료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지원단에 참여한 이제정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사업과장(정신건강학과 전문의)은 “불안·슬픔·죄의식·집중력 저하·불면 같은 급성 스트레스 증세를 고통으로 호소한다. 엄청난 재난과 충격 탓에 나타나는 반응인데 정상인들의 정상 반응이다”고 말했다. 이제정 과장은 “세월호 참사 때 심리 회복지원에도 참여했었는데 세월호 유가족이 보인 심리 반응과 비슷하다. 이번 화재 참사를 겪은 유가족과 생존자는 바로 희생자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분노, 공포심 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원단은 병원 입원 환자, 유가족, 소방관, 희생자의 친구·지인, 시민 등을 대상으로 단계적 심리 안정 지원에 나설 참이다. 유용권 제천보건소 건강관리과장은 “제천은 비교적 좁은 지역이어서 그런지 제천 전체가 아프다고 할 정도로 심리적 불안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지지 않게 초기에 적절하게 대응하려 한다”고 말했다.

제천/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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