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호부터 신문을 모아 보관해온 최병용씨가 ‘애장품’을 떠나보내면서 창간호 신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자식을 돌보는 심정으로 그동안 신문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쩔 수 없이 고물상에 건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겨레 본사에서 신문을 가져가니까 마음이 편안하고 눈물이 나려고만 합니다.”
지난 30일 오전 10시께 전북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최병용(73)씨 집 마당. 한겨레신문사에서 보낸 트럭이 대문 앞에 멈췄다. 창간호부터 29년2개월치 종이신문 <한겨레>를 모은 독자 최씨의 애장품을 수거하기 위해서다. 최씨는 그간 소장해온 신문을 처분하기로 했다. 집에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고 본인의 건강도 좋지 않아 ‘한겨레 수집광의 삶’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겨레신문사에 이런 사정을 전화로 알렸다.
신문으로 집 꽉 차자 처분 결정 30일 ‘한겨레’서 트럭 보내 ‘수거’ 상자 64개 분량에 불배날 메모까지 작년까지는 버스정류장 나가 신문 받아 “종이신문을 봐야 속이 시원해져”본사 내년 창간 30돌 활용방안 검토
최씨가 수집해온 ‘한겨레’ 29년 2개월치가 상자 64개에 담겨 있다.
최씨가 적어 놓은 배달되지 않은 날 메모.
이날 마당에 부려진 종이신문 <한겨레>는 종이상자 65개에 담겨 있었다. 배달이 안 된 신문 날짜를 따로 적은 메모도 끼여 있다. 최씨는 12년 전인 2005년 한겨레 창간기념호에 애독자 사연으로 보도된 바 있다. 당시 일부 폐기하고 남긴 신문과 그 뒤부터 꾸준히 모은 상자 64개 분량의 신문을 1.2t 트럭에 맡겼다. 창간호부터 두어달치 신문이 든 상자 1개는 빼놓았다. 트럭은 대문 높이가 낮아 마당으로 들어오지 못해 일일이 상자를 출입구까지 날라야 했다. 트럭은 이날 11시께 서울 한겨레신문사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그동안 모은 신문을 단독주택 2층에 보관하다 ‘눈물의 처분’을 결정한 2주 전부터 마당 창고로 옮겼다. 그동안 간간이 비가 온 탓에 신문상자엔 습기가 차 일부엔 곰팡이가 서렸다. 최씨 부인은 “신문지를 방에 차곡차곡 쌓아 놓아서 웬수였다. 이제 속이 다 시원하다”고 말했다. 부인은 “운동을 하다가도 아침에 신문이 올 때면 버스정류소에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남편이 지금도 최근치 신문을 버리지 않고 모아서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최씨는 “단독주택 2층에 보관했기 때문에 신문지로 인해 집이 무너지겠다고 아내가 자주 불평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신문을 모은 이유에 대해 “보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사실이고 역사이다. 죽을 때까지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양이 많아지니까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부담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종이신문을 보는 이유에 대해 “젊은이들과 세대 차이도 있겠지만, 인터넷으로 보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신문을 봐야 일단 속이 시원하고 자료로 보관하기도 하고 오전에 못 본 기사는 저녁에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배달망이 닿지 않는 산골에 사는 탓에 최씨는 지난 1월까지는 집으로 배달된 신문을 보는 게 아니라 정류장까지 직접 찾아가 버스가 싣고 온 신문을 가져왔다. 매일 오전 7시40분 버스가 배달부였다. 버스시간을 놓치면 받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올해 2월부턴 우편으로 신문을 받는다. 당일 오후 2시께 받기도 하지만 이르면 오전 11시께 전달받는다.
최씨는 1988년 창간 당시 무주지국장이던 김세웅 전 무주군수한테 설천면 지역 배달 부탁을 받고 자신의 조카에게 배달일을 맡기기도 했다. 야당 소속이던 최씨는 “1988년 당시에는 시골에서 한겨레신문을 구독하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관에서도 한겨레신문을 보면 사시적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이 마을 주변에 신문 유료 독자는 최씨 혼자다. 그는 “예전에는 한겨레가 영어를 안 쓰고, 혹시 사용하더라도 설명을 잘 해주었는데 지금은 그런 친절함이 사라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최씨가 <한겨레> 창간호를 들어 펼쳐 보였다. 강산이 세 차례나 바뀐 탓인지 36면짜리 창간호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1면 왼쪽에는 창간사가 있고, 오른쪽에는 백두산 천지 사진과 함께 ‘6천만의 그리움 끝이자 희망의 시작 백두산 천지’라는 세로 제목이 달렸다. 현재 남북한 인구는 7700만여명이다. 그는 “1988년 신문을 보면 지금은 고인이 된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야당 시절 활동이 나온다. 누렇게 변한 신문지에서 본 이들의 모습에서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최씨는 맹호부대 의무중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쟁에 복무했다. 1968년 1월에 귀국한 그는 자신의 전우였던 서울 출신 윤재용씨를 귀국 뒤 한번도 못 봤다며, 윤씨가 이 기사를 보면 자신에게 꼭 연락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는 요즘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고백했다. “한겨레도 이제 변화된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은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이 됐으니 지나치게 한쪽만 편드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내년이면 30주년이 되니까 성숙해져야 합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한겨레>를 볼 겁니다.”
한겨레신문사는 창간 30주년인 내년 5월15일을 전후해 최씨의 신문을 의미있게 활용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다.
무주/글·사진 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