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 쿠바 횡단을 마쳤을 때 최인섭(55)씨의 자전거 속도계에 찍힌 거리는 1221㎞였다. 서울에서 부산을 다녀온 뒤 다시 부산을 가고 남을 거리였다. 낯선 나라의 기다란 동서를 찍고 혼자서 수도 아바나로 돌아오는 길, 그는 타성에 젖었던 일상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30년 동안 일하고 있는 최씨는 몇 년 전부터 갱년기를 겪으며 여러 날 무기력했다. 그때 우연히 읽은 쿠바 자전거 여행기에 가슴이 뛰었다.
마침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 뒤 ‘장기 재직 휴가제’를 시행했다. 만 20~29년 재직자에게 딱 한 번 20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지난해 휴가를 신청하면서 목적을 ‘쿠바 여행’이라고 적었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하는 공공의료 체계와 도시 생태 농업, 무엇보다 경제는 어려워도 삶을 즐길 줄 아는 쿠바인의 일상이 보고 싶었다.
“쿠바로 자전거 여행을 간다니까 동료들이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사회주의 국가인데 위험하지 않겠냐, 그 먼 곳을 어떻게 가냐…. 하도 걱정을 해서 돌아온 뒤 기록을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최씨는 자전거 여행은커녕, 자유여행 자체가 처음이었다. 훈련에 착수했다. 20㎏의 짐을 실은 자전거로 서울~춘천을 왕복했다. 함께 가기로 한 친구와 경기도 양평에서 충북 충주까지 동반 연습도 했다. 스페인어를 석달 공부하면서 기본적인 여행 회화도 익혔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그는 ‘꿈속’처럼 쿠바에 있었다. 나라가 허가한 공식 숙소로 1만원에 아침식사까지 가능하지만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카사’에서 하루 피로를 풀어가며 헤밍웨이가 머물던 코히마르, 체 게바라가 잠든 산타클라라를 지나 서쪽 끝 마리아 라 고르다까지 폐달을 돌렸다.
그는 서울시에서 장애인 복지 업무를 맡아왔다. 그곳에서도 숨기질 못했다. 아바나를 출발해 카마궤이 마을로 가는데 자전거에 단 태극기를 보고 현지인이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서울을 안다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아들로 보이는 아이가 말은 안 하고 웃기만 하는데 지적장애가 있어 보였다.
“쿠바의 장애인 정책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스페인어 실력이 짧아 답답하기만 했죠. 그 뒤로 다니면서 유심히 봤지만 지체장애인은 거의 못 봤습니다. 공공의료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중국산 버스, 한국산 승용차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차량이 50년 이상 되어 공장 굴뚝 수준의 매연을 내뿜었다.
최씨는 귀국 뒤 국내 자동차 제조사에 전화를 걸어 쿠바와 수교할 때를 대비해 매연 저감장치를 무료로 달아주는 사회공헌사업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무기력’이 ‘오지랖’으로 바뀐 셈이다.
또 <미지의 땅을 두 바퀴로 달리다>라는 책을 560권 찍어 주위에 나눠줬다. “한 권은 시장실에 드렸더니 시장님이 전화를 걸어 장기 재직 휴가를 다녀온 사람들끼리 발표회도 제안하시더군요. 휴가로 삶과 업무의 의욕을 되찾은 제 경험을 많이 나누라는 의미겠죠. 장기 재직 휴가제를 시행하는 자치구가 늘고 있어 다행입니다.”
최씨는 귀국 뒤 중남미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3주 전에는 서울시 공무원끼리 하는 스페인어 학습 동아리에 들어갔다.
이번 여름휴가도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아니 훈련이다. “언젠가 남미 여행을 갈 겁니다.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길 끝까지 가볼 생각입니다.”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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