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여 전인 지난해 3월15일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강아무개씨 등 ‘삼례3인조’(왼쪽부터)와 이 사건으로 숨진 할머니의 사위 박성우씨, 전주교도소 교화위원이었던 박영희씨가 전주지법에 삼례3인조의 재심청구서를 내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 제공
1999년 2월6일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서 할머니를 숨지게하고 금품을 강탈한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에서 이아무개(48)씨가 17년 만에 자신을 비롯해 ‘부산3인조’가 진범임을 고백했다. 당시 구속된‘삼례3인조’는 경찰과 검찰, 법원에서 범행을 자백했고, 경찰 현장검증조서와 검사 신문조서가 주된 유죄 증거였다.
그러나 현장검증조서는 경찰의 ‘연출과 감독’에 의해 허위 작성된 정황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검찰은 삼례 3인조를 구속한 뒤 1년도 안 돼 부산3인조가 진범임을 밝혀내고도 4개월여 만에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이 진범은 풀어주고 무고한 스무살 안팎의 청년 3명(삼례3인조)을 범인으로 꾸민 것일까? 검찰은 법원 재심이 이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들의 억울한 옥살이를 방치한 것일까? 17년 전 검찰 수사의 의문점을 짚어본다.
◇부산3인조는 신의 경지?
삼례3인조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 확정 판결이 내려진 직후인 1999년 11월24일 부산지검에 진범에 대한 제보가 접수됐다. 부산지검 강력부 강아무개 전 수사관은 “제보자를 만난 뒤 이를 보고하니 최아무개 검사(현 검사장)가 ‘만약 사실이라면 검사가 해야할 일’이라며 내사에 착수했다”고 했다.
형이 확정돼 옥살이를 하고 있는 삼례3인조가 있었음에도, 부산3인조는 검찰에서 생생한 범행 정보들을 쏟아냈다.
강씨는 “제보자 조사에서 나라슈퍼에 들어가는 과정과 방법, 이동수단 등에 대한 진술을 들었다 그 뒤 전주지검의 기록 사본, 대법원 판결과 대조해 보니 너무나 똑같았다”고 말했다.
부산지검은 이들로부터 범행 현장 내부 구조, 강취한 현금·패물이 있던 장소와 처리, 숨진 피해자 상황 등 범인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구체적 진술들(<표> 참조)을 확보했고, 패물 처리 결과도 확인했다.
그러나 부산지검 내사는 2개월 만에 중단됐다. 전주지검으로 내사 기록을 이첩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의욕을 보였던 최 검사(현 검사장)는 <한겨레>에 “검찰 상황을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강 수사관은 그러나 <한겨레> 등에 “(당시) 검사장이 전주에 있다 왔다. 말 못할 사연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부산지검 검사장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이아무개(현 대형로펌 대표)씨로, 삼례3인조 사건 당시 전주지검장이었다. 강 전 수사관은 “수사 절차상으로는 차장검사 전결 사건이어서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검사장이 관할 밖 사건을 미리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삼았고, 전주지검으로 이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부산3인조를 넘겨받은 전주지검 최아무개 검사(현 대형로펌 변호사)는 2달여 뒤인 2000년 3월21일 이들을 무혐의 처분했다. “부산지검과 전주지검 1차 조사에서는 범행을 시인했으나, 2차 조사에서는 이를 번복했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의 무혐의 결정 직전인 2000년 3월께 전주지검 청사에 부산3인조와 삼례3인조가 처음으로 한 방에 모였다. 서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고 한다. 삼례3인조 강아무개씨는 “검사가 ‘네가 범행했지’라고 물어서 내가 ‘예’라고 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3명(부산3인조)에게 ‘들었지?’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순간 이씨는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씨는 “방안에 있던 삼례3인조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더라. 우리가 범행했는데 우리가 범인이 아니라고 하니, 안도감과 삼례3인조에 대한 미안함이 복잡하게 얽혀 눈물이 흘렀다”고 말했다. 이씨는 “어느 바보가 (검사가) 니가 (범인이) 아니라는데 끝까지 내가 했다고 하겠냐”고 말했다.
삼례3인조 대법 유죄판결 뒤
부산지검서 부산3인조 내사
범행·현장진술 실제와 똑같은데
2개월만에 내사 중단
당시 수사관 “말 못할 사연있다”
부산지검 이아무개 검사장
관할 밖이라며 전주 이첩 지시
그는 첫 수사 때 전주지검장
전주지검서 두 3인조 재확인
‘삼례’한테는 “범행했지?” 압박
‘부산’한테는 “쟤들이 했다잖아?”
나라슈퍼 내부구조 그림 왼쪽은 1999년 2월6일 경찰이 그린 것. 오른쪽은 2000년 2월1일 전주지검에서 부산3인조 이씨가 그린 것. 부산3인조 이씨가 전주지검 조사 과정에서 실제 내부구조와 거의 똑같은 그림을 그렸으나, 전주지검은 부산3인조를 무혐의 결정했다.
◇“검사한테 얻어맞았다”
삼례3인조는 전주지검에서 3∼4차례 신문조서를 작성했다. 검사 신문조서는 자백 뿐인 이 사건에서 경찰의 현장검증조서와 함께 이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 또한 의문투성이다. 조서 곳곳에는 오타 등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들이 발견되고, 피의자가 자신의 진술서에 제3자로 등장하는 등 급조된 흔적도 있다.
삼례3인조 강아무개씨의 1회 신문조서에는 ‘방안이 컴컴해서 임아무개가 델레비전을 켰습니다’라고 써 있다. 임아무개씨의 검찰 1회 신문조서에는 ‘방안이 컴컴해서 제가 델레비전을 켰습니다’로 주어만 바뀌었을 뿐 ‘델레비전’이라는 오타까지 일치했다.
임씨의 2차 신문조서에는 ‘저는 식칼을 들고 최아무개는 도라이바를 들고’라는 문장은 최아무개씨의 2차 검찰 신문조서에서도‘저는 식칼을 들고 최아무개는 도라이바를 들고’라고 똑같이 나온다.
검찰이 조사 과정에 폭력을 사용했다는 증언도 처음 나왔다. 경찰로부터 삼례3인조의 공범으로 지목됐다가 직장 사장의 알리바이 제시로 간신히 풀려났던 박아무개씨는 검찰에 재소환됐다. 박씨는 <한겨레>에 “당시 검찰 조사에서‘(삼례3인조가) 했다고 하는데 왜 너는 끝까지 안했다고 하냐’며 책 같은 것으로 머리를 맞았다”고 말했다.
삼례3인조의 진술 능력도 문제였다. 1명은 당시 지적장애가 있었고 다른 1명은 이후 장애 판정을 받았는데, 이들의 진술서에는 이들이 법정 용어를 동원해 술술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나온다.
박씨는 당시 검찰과 경찰에서 이들의 진술서를 보았다. 그는 “○○형은 아예 한글을 모르던 사람이다. 자필로 그렇게 썼다는 게, 제가 그때 느낀 건 ‘이 형들은 아니구나, 누가 불러주면서 쓰라고 한 것이구나’ 였다. 조작이 너무나 느껴졌다”고 말했다.
전주교도소 교화위원이었던 박영희씨는 “상담할 때 애(강씨)가 아둔해 보여서 이야기를 물으면 물을수록 아니올시다였다. 자술서를 쓸 때 샘플을 보고 한글을 그렸다. 한글을 모른다. 한글을 교도소에서 깨쳤다”고 했다.
◇검찰은 삼례3인조의 재심청구를 반대했을까
삼례3인조 중 그나마 혐의를 부인했던 최아무개씨가 2000년 6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전주지검은 그러나 전주지법에 낸 의견서에서 ‘부산3인조의 자백의 신빙성이 부족한 반면, 삼례3인조의 자백의 신빙성이 높다’고 기각 의견을 냈다. 더욱이 부산3인조 조아무개씨 등은 필로폰 투약사범이라 자백 내용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고, 이런 검찰 주장이 받아들여져 재심은 기각됐다.
하지만 지난해 3월 2차 재심을 청구한 변호인단과 삼례3인조는 검찰의 자의적 판단이라고 비판한다. 당시 현장검증에서 삼례3인조는 범행 현장 상황을 제대로 몰라 우왕좌왕하는 반면, 부산3인조는 범인만이 알 수 있는 구체적 진술을 했고 그 진술이 실제 상황과 맞는데도 이를 필로폰 투약사범의 말이라며 배척하는 것은 자의적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검찰은 재심 기각 사유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부산3인조는 나라슈퍼 현관문을 사용하기 위해 사용한 ‘빠루’와 ‘신호’ 등 범행 도구에 대한 진술이 엇갈린다는 점, 슈퍼 유리문 경보음을 삼례3인조는 들은 반면 부산3인조는 듣지 못했다는 점, 부산3인조는 차를 이용해 도망갔다고 진술했으나 피해자는 시동 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진술한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삼례3인조의 재심청구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물인 패물이 나온 아기베개와 패물 처리업자까지 나왔는데도, 전주지검은 어떤 패물인지도 모르고 땅에 묻었다는 삼례3인조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며 수사를 하지 않았다. 또, 부산3인조 진술에는 출입문을 손괴하고 피해자를 협박하는 도구로 빠루와 신호가 사용됐고 범인만 알 수 있는 사건 정보들이 가득한데도 검찰은 부산3인조의 진술이 엇갈린다는 등 대부분 지엽적인 불일치에 의미를 둔 채 삼례3인조를 범인으로 몰아갔다”고 반박했다.
양쪽의 엇갈린 주장은 2차 재심 청구에서도 쟁점이 되겠지만, 검·경의 부실 수사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전주지검에서 조사를 받은 부산3인조 이씨는 범행을 자백했는데도 이를 부인 쪽으로 몰아가는 검찰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검사가 (부산3인조) 조○○한테 ‘꼭 감옥에서 살아야 벌 받는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검사가 진범을 알면서도, 우리가 맞는데도 빼준다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전주지검 고위 관계자는 “진범(이씨)이 진술을 번복했다가, 지금은 공소시효에 아무 문제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한다. 당시를 알 수는 없지만 검찰이 진실을 알고 수사를 왜곡시킬 수는 없다. 몰라서 판단을 잘못하는 오류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삼례3인조)이 (범행했다고) 말하면 (실제로) 했겠지라는 생각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17년 만에‘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은 진범의 고백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았지만, 최대 피해자인 유족은 물론 삼례3인조와 부산3인조에게도 상처를 남긴 이 사건의 진실 규명은 법원에 넘겨졌다.
지난 6일 <한겨레> 기자와 만난 이 사건의 유가족 최아무개씨는 “진범을 잡아서 끝냈으면…. 20년 가까운 세월인데 그때 제대로 해결이 됐으면 몇 년 힘들다가 잊어버렸을 것 아닌가. 17년간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고 말했다.
수원 전주 부산/홍용덕 박임근 김영동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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