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화 작가가 안정리 마을 브랜드 제작소에서 미군장교와 병사 가족들에게 미군의 전투식량(Combat-Ration)을 패러디해 만든 시레이션(Culture-Ration) 브랜드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경기문화재단 제공
“성(性) 대신 안정리의 기억과 문화를…”
한때 5천여명의 미군이 있던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캠프 험프리스(K-6)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미군기지 통합이 본격화되면서 미군은 3만여명으로 늘었고 2016년 이후에는 미군 4만4천여명과 가족 등 8만여명이 거주하는 ‘동북아 최대의 미군기지’로 탈바꿈한다.
기지 통합으로 지역경제가 펴질 것이라던 안정리 주민들의 기대감은 하지만 3년도 안 돼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이제 마을의 쇠락을 걱정하는 처지다. 30년간 이곳에서 양복점을 운영했던 차동길(64)씨는 “기지 안에 쇼핑몰이 있고, 미군 병사들이 외출해도 이태원이나 송탄으로 빠져나가 거리는 썰렁하고 주민들 살기가 더 어렵다”고 말했다.
안정리에서 마을 재생사업이 시작된 것은 2013년이다. 경기문화재단과 평택시가 한때 ‘기지촌 여성’이 주고객이던 옛 보건소 건물을 개조해 ‘팽성 아트캠프’를 설치하고 지난 9월 ‘안정리 마을브랜드 제작소’를 열었다.
25일 이곳에서 만난 주민 김기분(69)씨는 직접 만든 가방을 선보이며 “미군들의 반응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15년간 기지 앞에서 또다른 양장점을 운영했던 김씨는 말하자면 ‘경쟁자’였던 차동길씨와 함께 제작소 작업실에서 재봉틀을 돌렸다. 미군 위장용 군복천을 재료로 삼은 가방엔 안정리 주민들이 집에서 키우던 설악초 등의 꽃들이 새겨졌고, 미군기지 철조망은 평화(Peace)라는 글자로 장식됐다. 기지 앞에서 수십년간 잔뼈가 굵은 지역 장인들의 손길이 이제 안정리의 꽃과 평화·사랑을 담은 가방과 파우치라는 마을 고유의 예술상품을 탄생시키고 있다.
안정리 마을브랜드는 지역자산 활용형 상품이다. 안정리 장인들이 제작을 맡고, 예술가 그룹인 ‘이웃상회 인(in) 안정리’가 상품 디자인 등을 거들었다. ‘안정맞춤 브랜드’ 외에도 미군의 전투식량을 패러디한 ‘시레이션(Cultural-ration) 브랜드’도 나왔다. 미군 전투식량을 개조한 파우치에는 마을의 가옥 지붕 등 지역의 숨결과 문화가 깃든 노트와 메모지, 스카프로 채워졌는데, 70종으로 브랜드를 확대해 미군들에게 판매할 예정이다.
시각예술가인 이미화 작가는 “안정리 도시재생은 미군들에게 성과 웃음을 파는 대신 안정리 마을에 대한 기억과 문화를 판매하는 것이다.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긍심을 갖고 문화예술품으로 마을을 살려내려는 시도다”라고 했다. 안정리 마을브랜드 제작소는 특히 2년에 한차례씩 바뀌는 신입병사들의 명소로 되어간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홍용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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