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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아무리 좋은 체제도, 권력자 마음이 나쁘면 소용없더라”

등록 2013-11-11 19:23수정 2013-11-12 15:37

윤공희 대주교가 지난달 28일 전남 나주시 광주가톨릭대 안 거처에서 현대사 굴곡 속에서 사제의 외길을 걸어오며 느꼈던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홍세현 5·18아카이브설립추진위원회 사무처장 제공
윤공희 대주교가 지난달 28일 전남 나주시 광주가톨릭대 안 거처에서 현대사 굴곡 속에서 사제의 외길을 걸어오며 느꼈던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홍세현 5·18아카이브설립추진위원회 사무처장 제공
[한겨레가 만난 사람]
‘수품 50돌 맞은’ 윤공희 대주교

1980년 신군부의 폭력에 맞섰던 윤공희(88) 대주교는 ‘광주의 대부’라고 불린다. 올해로 주교 수품 50돌을 맞은 그를 지난달 28일 전남 나주시 남평읍 광주가톨릭대 안 거처에서 만나 2시간30분 동안 인터뷰했다. 하얗게 센 머리를 단정히 빗어올린 채 은테 안경을 쓴 그는 마치 따사로운 봄볕 같았다. 윤 대주교는 지난달 22일 천주교 광주대교구가 마련한 주교 수품 50돌 기념행사를 마친 뒤라 홀가분해 보였다. 노대주교는 답변 도중 간간이 유머를 툭 던진 뒤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다. 평양과 경기·서울을 거쳐 광주에서 40년 남짓 생활한 그의 어투엔 평양·서울·전라도 입말이 섞여 듣기에 구수했다.

인터뷰/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주교 수품 50돌 기념행사 때 윤 대주교의 영상물을 시청하던 신자들이 소년 시절 사진과 애창곡을 소개할 때 환호성을 터뜨리더라.

“전에는 성가를 많이 불렀는데, 주교 된 다음에 잔치하는 자리에서 ‘노래하라’ 그러면 생각나는 거 하다 하다 보니까 (‘꽃반지 끼고’가) 애창곡이 됐다.”

-그때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좋다고들 그런다. 그래도 잠자리가 시원치 않으니까 자꾸 깨고. 오전엔 특별히 머리가 좀 무겁고. 이제 (부담을) 좀 놓았는가 했는데 오늘 또 이런 자리(인터뷰)가 있지 않나.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기사 쓸 때) 미화하는 그런 말들은 빼라. (민감한 문제는) 물어보지 않으면 더 좋고.(웃음)”

윤 대주교는 1924년 11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평남 중화군 출신인 아버지 윤상(베드로)씨와 어머니 최상숙(빅토리아)씨의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하루 만에 유아세례를 받고, 빅토리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함경남도 원산의 덕원신학교(1937년~49년 5월)를 마치고, 50년 1월 월남했다. 의사였던 맏형이 유일하게 남한 내 혈육이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지학순(1921~93) 주교와 함께 월남했다. 2001년 <가톨릭신문> 기고문에 ‘이 한가닥 쇠줄이 뭐길래 핏줄을 갈라놓는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니 허탈하다’고 썼던데.

“월남한다는 게 모험이었다. (지 주교와) 아주 이상한 안내 경로를 통해 (서울로) 오게 됐다. 38선 직전까지 오니까 안내자가 ‘요게 38선이다. 다 왔다’고 그러더라. ‘조금만 더 가면 길에 무슨 표시가 있다고’ 하더라. 우리 소리를 듣고 남한 보초가 나올 거라고. 그러면 즉시 손을 번쩍 들고 ‘월남자요’라고 하라고. 38선엔 철도 레일 같은 것을 가로로 걸어놓았더라.”

-한국전쟁 때 평양에 가서 부모님을 뵌 게 마지막이 됐는데.

“평양 수복(50년 10월)이 되니까 메리놀선교회 소속 신부를 따라 평양에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조지 캐롤 신부가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나에겐 평양시 북쪽에 있는 영유본당으로 가라고 하더라. 며칠 있으면 가려고 마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룻밤 (진남포에서) 자면서 부모님 만나고 미사도 드리고 돌아왔다. (생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중공군 침입한 다음에 며칠 후에 즉시 내려가라고 해서 서울로 내려왔다.”

-1985년 첫 이산가족 상봉 때 여동생(윤요안나) 만나는 것을 포기했다던데.

“그때 당국에서 나한테도 ‘갈 수 있다’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이북에 있는 내 가족들이 신앙적으로 어떻게 지낼까’를 생각해봤다. 어쩌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감추고 살지도 모르고. 내가 가면 다 노출될 거 아니겠나? 그래서 ‘안 가겠다’고 했다. 지 주교님이 동생을 만났는데 첫마디가 ‘여기가 천국인데 거기서 뭘 하려느냐’고 했다더라. 그 말을 듣고 (상봉을) 꺼렸는데, 2차부터는 파탄이 났다.”

-2011년 고향에 한번 갈 기회가 있었는데, 심장 수술 때문에 못 갔다고 들었다.

대선개입 의혹을 지켜보면서
국민들은 알권리가 있고
할 말은 해야한다는 걸 느껴

1980년 광주의 그날
피흘리는 청년을 바라만 봤다
부끄럽지만 무서워서…
소외된 자들과 함께 살았는가
나는 아직도 많이 반성한다

“십몇년 전까지는 미국 영주권을 가진 친척 형을 통해 간접적으로 (여동생이) 평북 강계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2011년에)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인 광주대교구청 김희중 대주교님이 종교인대표자회의 관계 때문에 중국 베이징에서 북쪽 종교계 인사를 가끔 만나고 그랬다. 김 대주교님이 동생 (안부를) 물어보겠다고 했다. 거기서 좋다고 했다더라. 대북 인도적 지원 모니터링하는 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들 가는데 끼어가면 되겠구나 했는데, 일이 커졌다. 그래서 마음에 부담이 됐지. 그런데 (수술 때문에 못 갔으니) 한편으론 다행이다. 여동생은 열 살 아래인데, 지금은 소식을 모른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인 ‘80년 광주 학살’의 증언자였다.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해(1956~60)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윤 대주교는 1963년 12월 초대 수원교구장을 맡아 10년간 봉직하다가 73년 11월 광주대교구장으로 부임해 27년 동안 헌신했다. 윤 대주교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부터 진상 규명과 군의 과잉진압 사과라는 입장을 줄곧 견지했다. 80년 5월19일 서울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광주의 상황을 가감 없이 전한 것도 그였다. 윤 대주교는 75~81년 국내 주교들의 협의체인 주교회의 의장을 맡았다.

-80년 5·18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것 같다.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밤 9시 이후 야간 통행이 금지되고, 새벽엔가 계엄군이 진입했다. 군인들이 젊은 사람 막 끌고 가 때리고 야단이 났다.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가기 직전(18일)에 광주가톨릭센터(광주 동구 충장로) 6층에서 내려다보니까, 젊은이 하나가 군인에게 맞아 앞뒤로 피가 흐르더라. ‘아, 응급실 데려가야 할 텐데….’ 비틀비틀하다가 건물 대문 쪽으로 털썩 주저앉더라. 그런데 내려갈 엄두가 안 났다. 무서워서. 민주화 항쟁 때 내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두 가지 중 하나다. 또 하나는 80년 6월 초 남동성당에서 시국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그런데 계엄군이 (성당 주위로) 다 포진해 또 그런 사태가 나지 않을까 자꾸 걱정이 됐다. 그래서 미사 직전에 ‘그만두자’고 했다. 한 신부님이 지나가면서 ‘꼬리 내리지 않았느냐’고 하더라. ‘아, 실수했구나’라고 반성하고 같이하겠다고 마음먹었다.”

-5·18 이후 보안대에 잡혀간 신부들 데리러 갔다가 강단을 보인 것이 지금도 회자되는데.

“전남도청이 진압된 뒤, 광주대교구 신부님 8명인가가 잡혀갔다. 나한테 한번 (군에) 왔다 가라고 하더라. 소령급 책임자가 종잇조각을 들고 오더라. 서명해 주라고. 그런데 읽어보니까 처음 시작이 ‘내란음모죄 혐의로 조사하다가 신병을 내보냅니다’라고 돼 있더라. 반사적으로 돌려줬다. (신부들에게) ‘오늘내일 나올 생각 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소령이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라며 내란 죄목이 없이 다시 (서류를) 썼다. 죄목이 들어가면 사인 안 한다고 했다.”

-5·18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을 몇 차례 만났다던데.

“(5·18 내란 혐의 등으로 사형이 선고된 정동년씨 등 4명의) 사면 관계로 만난 것은 혼자 갔다. (81년 3월31일) 대법원 마지막 판결 때 다들 같이 올라가 방청했다. 인혁당 사건(74년)으로 6명인가 7명인가 판결 바로 다음날 사형 집행해 긴장했다. 그런데 ‘네 사람 사형 확정’. 가족들이 나를 붙들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하더라. 그때 전 대통령이 광주 방문 때 ‘서울 올라오면 한번 들르십시오’라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수도(경비)사령부 군종신부를 통해 (신군부 쪽에) 그 말을 하라고 했다. 만나자고 하더라. 단둘이 만났다. 만나서 긴 이야기 할 것도 없고, ‘또 인명이 손실되는 일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사면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버스로 군경을 치어 죽게나 다치게 했던 이를 들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느냐’ 그 말 하더라. 그래서 뭐, 나오면서 문간에서 내가 다시 ‘사면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대주교님이 대통령이라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더라. (가족들에게) 그대로 말할 수도 없고, ‘부탁을 했으니까 어떻게 되는가 기다려보자’고 하고, 광주에 내려왔는데, 그다음 날 사면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성심여고 재학생일 때 만났다던데.

“63년에 수원교구 주교가 된 뒤 67년에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했다. 성심여고가 용산에 있었다. 그 학교 교장 수녀님이 학생들에게 견진성사(세례성사 다음에 받는 의식)를 따로 한번 해달라고 해 그러자고 했다. 갔더니 박근혜 대통령을 인사시켜서 봤다. 그 뒤로 서강대 가고 그랬으니, 신자처럼 살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뒤) 교회가 (지학순 주교 구속 등으로) 박정희 정부하고 대결하고 야단이 났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침묵이 길지 않나?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있고, 그때그때 말씀을 발표하시고. 4대강 문제나 제주 강정마을 문제도 주교회의에서 슬기롭게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어 다행이고. 국정원 (대선 개입)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국민의 알권리가 존중되는 세상이 돼야 되겠다 (하는 것을 되새겼다). 진실을 알게 해줘야지. 아무리 좋은 체제라고 하더라도 체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 마음에 달렸다. 진실, 양심, 자기의 사리사욕을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마음에 달린 것이다.”

-광주대교구장에서 은퇴하면서 워드프로세서를 배운다고 했다던데.

“‘아이고 야, 은퇴하면 뭘 하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이 번역된 교회 문서들이다. 그런데 읽어보면 잘 못 알아듣겠더라. ‘아, 참, 번역이라는 것이 어려운 일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나? 은퇴하면 이런 것 하면 좋겠다고 해서 워드프로세서를 배우려고 했다. 그런데 빨리 배워지지도 않고, 모니터가 휙휙 돌아가면 머리가 아프더라. 아이고, 못하겠다. 그래서 포기했다.”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 얼마나 함께 살았는가에 대해 많이 반성한다. 최인호 소설가가 병원에 있을 때 쓴 <인생>이라는 책에 성인의 말씀을 인용했더라.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맡겨라. 미래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라.’ 그렇게 하면 얼마나 멋있겠나. 모든 것에 대해 사랑이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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