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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삭막? “우리는 체육대회 열고 김장도 함께 해요”

등록 2013-05-15 16:40

지난해 10월3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 이펜하우스 3단지 앞 신은초등학교에서 열린 주민 체육대회 모습.  나무그늘 제공
지난해 10월3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 이펜하우스 3단지 앞 신은초등학교에서 열린 주민 체육대회 모습. 나무그늘 제공
[한겨레 창간25돌] 도시의 미래를 보다
서울 신정동 이펜하우스 공동체

또래 아이들 둔 주부들 모여
버려진 공간에 도서관 열고
얼굴 모르던 이웃과 친해져

시골체험 ‘번개’ 등 각종 모임
인근 주민들과 강좌도 구상
탁자에 모인 초등학생 서넛은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했다. 한 아이가 그림책에서 신기한 걸 발견한 듯 책을 짚어가며 수군거리자 둘러앉은 아이들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다른 탁자엔 하나둘 짝을 지은 아이들이 골몰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지난 6일 오후 봄볕이 창가에 드리운 서울 양천구 신정동 이펜하우스 아파트 3단지 작은도서관 ‘나무그늘’엔 10명 남짓한 아이들의 생기가 스무평 공간에 가득했다. 한쪽에선 30~40대 주부 서넛이 휴지를 오려 액자 장식으로 만드는 수공예에 한창이었다.

현업에서 은퇴한 뒤 한달에 4차례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한다는 3단지 주민 장주환(67)씨는 아이들이 마냥 귀엽다고 했다. 장씨는 “목동에 살다가 이사왔는데, 이곳 주민 가운데 젊은층이 많아서 그런지 어린이들이 많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책 읽어주는 재미가 새록새록하다”고 말했다.

장씨처럼 도서관을 돌보는 주민 자원봉사자는 어른 22명, 청소년 18명으로 40명에 이른다. 어른과 청소년이 짝지어 휴일을 빼고 날마다 오후 2~5시 이곳을 지킨다. 한 사람이 하루 3시간씩 한달에 2~4번 봉사한다. 낮 시간이 여유로운 주부들이 많지만 장씨처럼 은퇴한 이도 있다.

이펜하우스 3단지 작은도서관 ‘나무그늘’.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펜하우스 3단지 작은도서관 ‘나무그늘’.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펜하우스 3단지 도서관은 지난해 4월 문을 열었다. 2011년 가을부터 입주가 시작됐으니 반년 남짓 공간이 놀고 있었다. 주택법에 300가구 이상 공동주택은 주민 공동시설로 도서실을 짓도록 돼 있다. 그런데 운영비 부담 때문에 사실상 공간을 버려두는 곳이 많다. 5단지까지 3060가구 규모인 신정동 이펜하우스도 300가구 미만인 5단지를 빼고 1~4단지에 도서실과 책이 있었지만 손길이 닿지 않았다.

가장 많은 1339가구가 사는 3단지 도서실도 이펜하우스를 지은 서울시 산하 에스에이치(SH)공사가 기증한 책 1000여권을 쌓아두기만 했다. 이곳에 생기를 불어넣은 이는 세 자녀를 둔 주부 이정아(44)씨였다. “입주자 대표회의에서도 고민하고 있더라구요. 책만 쌓아두고 운영할 사람이 없어 문을 못 열고 있다고. 누군가 나서서 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손을 들었죠.”

이펜하우스의 초등학생은 대부분 바로 앞 신은초등학교에 다닌다. 초등학생 아이를 둔 주민들은 같은 학교 학부모다. 이씨도 이웃들과 모임을 꾸려 도서관 운영에 나섰다. 양천구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기증도 받고 서울시 작은도서관 지원 사업에 응모해 4000권 가까이 모았다.

지난해 10월22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 이펜하우스 3단지 안 관리사무소 앞 분수광장에서 작은도서관 ‘나무그늘’ 주최로 음식나눔행사를 열고 있는 도서관 주민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나무그늘 제공
지난해 10월22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 이펜하우스 3단지 안 관리사무소 앞 분수광장에서 작은도서관 ‘나무그늘’ 주최로 음식나눔행사를 열고 있는 도서관 주민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나무그늘 제공

이들은 돌아가며 도서관 문을 열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자연스레 공동체처럼 돼갔다. 공예를 배우거나 영화도 같이 보고 김장도 함께 했다. 지난해 10월엔 3단지 주민들과 함께 제법 규모 큰 체육대회, 음식나눔 행사도 열었다. 봉사자들이 하나둘 늘면서 이웃들은 친구처럼 됐다. 프로그램 운영 비용은 서울시의 부모 공동체 지원 사업을 통해 받거나, 인근 복지관과 함께 기획하는 방법을 썼다. 경험이 쌓이면서 북카페·탁구장 운영에도 욕심을 냈다. 아파트 빈 공간을 놀리는 게 아까웠다고 했다.

이런 공동시설은 전기료 같은 것을 모든 세대가 분담한다. 입주자 대표회의가 반대하면 어려웠겠지만, 호응해줬다. 에어컨으로 냉난방을 하는 도서관의 전기료는 3단지 1339가구가 한 가구당 여름·겨울엔 월평균 380원, 봄·가을에 210원씩 부담한다.

이펜하우스 1~5단지는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가 섞인 이른바 ‘소셜믹스’(social mix) 아파트다. 임대아파트가 전체의 절반을 웃돌아 입주자 대표회의에 임대가구 대표도 들어간다. 자연스레 여러 계층이 모여 살고 특히 젊은층이 많다.

서울시와 경기도 부천시 경계에 있어 주거환경 우수상을 받을 만큼 조용하고 쾌적하다. 반면 양천구 목동까지 버스로 40분쯤 걸리는 교통 불편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 주민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에선 이것저것 나누고 빌려쓰는 일이 자연스럽다. 시골에서 기른 상추를 나누고 작아져서 못 입는 옷을 내어주고 잔칫날 필요한 교자상을 빌린다. 주말 딸기농장, 박물관, 시골 체험 등은 ‘번개’로 연락해 다닌다.

이런 분위기 덕에 다른 1·2단지나 4·5단지 아이들이 3단지 도서관을 이용하는 문제도 쉽게 풀었다. 3단지 주민들이 전기료를 내는데, 다른 단지 애들까지도 이용하게 하느냐 얘기도 있었지만, 논의 끝에 결국 단지를 따지지 않고 개방하기로 했다.

이씨와 주민 봉사자들은 도서관을 리모델링할 참이다. 키 작은 아이들이 쓰기에 불편한 탁자와 의자를 치우고, 바닥재를 깔아 눕거나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도록 할 참이다. 최근엔 어른들이 볼만한 책을 갖춰놓고 빌려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 어른들을 위한 문화강좌, 영화 상영회도 기획하고 있다. 물론 3단지 주민만이 아닌 인근의 모든 이웃들이 대상이다. 주민들끼리 강사가 되고 수강생이 되는 ‘재능을 나누는 프로그램’도 운영할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시작한 아파트의 마을 공동체가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을 이씨와 주민들은 함께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나무그늘’ 이끄는 주부 이정아씨

이웃들과 봉사활동하며 더불어 사는 맛 느껴요

이정아씨
이정아씨
서울 양천구 신정동 이펜하우스 3단지의 작은도서관 ‘나무그늘’ 운영을 주도한 이정아(44·사진)씨는 아이가 셋 있는 주부다. 막내가 4살 되던 해 맞벌이를 해야 할 때까지 이씨는 결혼 15년 동안 “집에 콕 박혀” 살았다고 했다. 셋째 아이여서 어린이집에 무료로 맡길 수 있었지만,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해 종일 근무를 하기는 어려웠다.

아이가 5살 되던 2007년 이씨가 살던 양천구 목2동에 지역아동센터 ‘나무와숲’이 설립됐다. 나무와숲은 초등학생인 두 딸과 막내까지 대가 없이 보살펴줬다. 누나들과 함께 있게 된 막내는 더는 엄마를 찾아 보채지 않았다. “지역아동센터가 너무나 고마워서 한 달에 한 번씩 봉사했어요. 만들기 수업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좋은 분들을 만났죠. 더불어 같이 사는 게 좋다는 걸 조금씩 느끼게 됐던 것 같아요.”

나무와숲은 아이 맡길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이웃을 위해 이현주 대표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 이곳에서 부모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이씨도 아이들에게 “내 아이 밥 먹이듯” 저녁과 간식을 지어주는 급식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초등학생만 다니던 나무와숲에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주민들은 중고생을 위한 기린청소년지역아동센터를 세웠다. 30년 전 동네에 들어선 마리아의딸 수도원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놀이터 ‘청청청’을 열었다. 수도원의 강옥로사 수녀는 “주민들이 이곳에 수도원이 있는지 몰랐다. 이젠 길에 나서면 아이들이 저만치서부터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다.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최근엔 ‘플러스마이너스1℃’란 이름의 젊은 공공미술 활동가들이 들어와, 각종 공동체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무와숲, 기린청소년지역아동센터 등과 함께 마을 축제도 연다. 주민들과 어우러지며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나눈다고 했다.

2011년 신정동 이펜하우스로 집을 옮긴 이씨가 동네 도서관 ‘나무그늘’ 운영에 앞장서게 된 것도 목2동에서의 경험이 컸다. 이펜하우스의 도서관 일을 맡아보면서,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변화를 모색중인 나무와숲에 예비 조합원으로 참여했다. 이펜하우스도 목2동처럼 됐으면 하는 게 이씨의 바람이다.

“아파트, 참 재밌어요. 사람이 사는 것 같아요. 같이 하면 흥도 나고, 누구든 한 사람이라도 싫어하면 우리는 안 하거든요. 억지로 하진 않아요. 사람들이랑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일이 많아요.” 박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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