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수준의 야생 생태계 교란은 인간의 삶과 경제의 교란으로 이어지게 됨을, 동물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이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음을 이제라도 알아채라고, 코로나 대란은 소리 없이 채근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코로나 19’ 뉴스를 시청하고 있으면 모든 CCTV 화면을 확인할 수 있는 통제실에서 각 화면을 열람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코로나 19 대란은 그간 잘 보이지 않던 사회의 사각지대를, 현실의 표면 아래에 있는 심층의 세계를 우리 눈에 드러내 보였다.
영생을 약속한 어느 종교집단에 빠져든 젊은이들이, 요양병원, 요양원이나 장애인 시설 같은 ‘반지하 세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던 이들이, 새삼 우리의 눈에 드러났다. 여행객과 컨테이너 박스들이, 유학생과 크루즈선들이 쉴 새 없이 오가던 ‘지구화된 세계’ 자체가 바이러스 확산의 결정적 수원지였음도 자명해졌다.
그런데 이 통제실에서 우리가 찾아낸 첫번째 CCTV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이번 대란은 보신에 눈먼 인간들이 야생동물의 세계를 ‘들쑤신’ 결과임을 보여준 화면 말이다. 코로나 대란 앞에서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면, 이 신형 바이러스가 자연에서 인간 쪽으로 돌아온 필연의 피드백이라는 점을 가장 먼저 말해야 한다. 극단적 수준의 야생 생태계 교란은 인간의 삶과 경제의 교란으로 이어지게 됨을, 동물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이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음을 이제라도 알아채라고, 코로나 대란은 소리 없이 채근하고 있다.
이번 재난은 그간 자연을 발아래 두고 짓누르며 야생의 문법을 얕잡아보며 살아온 우리 모두의 ‘윤리 없음’의 재난, 그로 인해 초래된 생태적 대재난 속의 소재난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떤 비평가는 이번 재난이 젊은 세대의 ‘미래 없음’이라는 재난 속의 재난이라 했다. 하지만 이번 재난은 그간 자연을 발아래 두고 짓누르며 야생의 문법을 얕잡아보며 살아온 우리 모두의 ‘윤리 없음’의 재난, 그로 인해 초래된 생태적 대재난 속의 소재난이기도 하다.
잘 살펴보면, 이런 소재난은 지금 지천에 있다. 한반도 남쪽의 산도 일종의 소재난을 치르고 있다. 2018년, 2019년 두번의 가을철에 떨어진 활엽수들의 잎들이 지독한 겨울 가뭄으로 숲바닥에 그대로 남아 2층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일부 가뭄을 면한 산도 있지만, 예외에 속한다.) 그런 기이한 숲바닥을 오가는 야생동물은 점점 희박하기만 하다. 찾아보면 있긴 있지만, 대다수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소슬한 이 빈 자리를 지금 마스크 쓴 인간군상들이 유령들처럼 떠돌고 있다.
아니, 잘 보면 이 빈집을 지키는 수호자들은 따로 있다. 야생과 문명의 경계지대에서, 지구적 탄소 자본주의 문명의 몸살을 멀찍이서 관망하며 유유히 날고 있는 새들 말이다.
생태적 대재난의 땅 위를 무심히 나는 새라니. 어쩐지 상징적이지 않은가.
한국인들은 대대로 오리, 기러기 같은 새의 형상을 긴 가지에 매달아 놓고 삶의 복락을 빌곤 했다. 이른바 솟대(솔대, 소줏대, 별신대) 신앙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새는 늘 상징의 동물이었다. 동서 할 것 없이 인류는 새를 기리며 살았고, 새에게 상징을 부여했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의 신 중 태양의 신과 복수의 신, 지식의 신은 새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새는 하늘의 힘을 지상에게 전하는 신성한 매개자였다.
고대 중국인들과 한국인들도 같은 믿음을 지녔는데, 그러기에 탄생한 상상동물이 봉황(고구려의 ‘주작’)이었다. 이곳에서 황제나 왕은 곧 봉황의 현신이었다. 중국, 고구려, 신라, 가야의 신화에 따르면, 부족(민족)의 시조들은 새처럼 알에서 태어났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인들은 대대로 오리, 기러기 같은 새의 형상을 긴 가지에 매달아 놓고 삶의 복락을 빌곤 했다. 이른바 솟대(솔대, 소줏대, 별신대) 신앙이다.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가 남긴 새 연작은 바로 이런 ‘조류 신앙’의 전통에서 뻗어 나왔다. 1910년, 그가 처음 빚은 새 조각상은 조국 루마니아의 신화 속 새인 ‘마이아스트라’(Maїastra, 루마니아 어로 부족장, 거장, 대장을 뜻한다)였다. 그런데 이 새-부족장은 1923년 제작된 ‘공간 속의 새’(Bird in Space)에서는 날고 있는 형상을 띠게 된다. 아마도 브랑쿠시는 솟대처럼 어딘가에 붙박인 부족장의 형상에는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1923년, 브랑쿠시는 솟대 위의 새를 하늘로 띄워 보냈다.
이것이 새라고? 날고 있다고? 그러나 이 기이한 새의 형상에서 우리는 인간의 그리움, 발원, 염원을 어렴풋이 본다. 이 새-부족장은 문제 상태에 있는 자기(현세)를 극복하려는, 그리하여 끝내 안식에 도달하거나 낙토(樂土)를 현실화하려는 인간의 꿈 그 자체다.
그러나 이것은 저 7세기 백제인의 반가사유상과는 달리, 새라는 비-인간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음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 새는 우리와는 완연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지만, 실은 그런 것도 아니다. 새는 우리와는 유다른 이들 같지만, 완전히 유다른 이들은 아니다. 이런 시각에서 태어났으니, 날고 있는 이 새-부족장은 새도 인간도 아니며 새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인수(仁獸) 공통의 존재’다. 또는 이 공통의 존재를 인지하고 살아가려는 새로운 존재다.
그렇다면, 이 조각상은 인간의 꿈 이상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자기를 극복한 근대인의 초상이다. 우리의 일상을 짓누르며 도시와 야생 양쪽에 드넓게 세력권을 확장하고 있는 바이러스스피어(virusphere, 바이러스 권)는 근대인의 자기 극복, 자기 혁명을 촉구하고 있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동물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