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가먼드 작가는 기억에 남는 모델로 ‘샘’을 꼽았다. 2019년 경기도 여주 개농장 당시의 샘(오른쪽)과 사진 작품 속 샘. 한국 HSI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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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들과 즉흥 댄스를 추는 거예요.”
프랑스 출신 사진작가 소피 가먼드는 개들과의 사진 촬영을 춤에 비유했다. 촬영은 순식간에 이뤄진다. 개들의 넘치는 에너지, 우정 그리고 찰나의 협력으로. 그의 모델은 국내 개농장에서 구조돼 입양간 17마리의 개들이다.
개농장에서 시작된 ‘개들과의 춤’
배우 다니엘 헤니의 반려견 ‘줄리엣’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의 말마따나 작품 속 개들은 반짝이는 리본과 화려한 스카프를 두르고 클럽에 놀러 나온 멋쟁이들 같다. 익살맞은 표정, 귀여운 미소 그 어디에도 개농장의 비참한 삶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지난 28일부터 서울 경복궁역 서울메트로미술관에서는 가먼드 작가의 국내 첫 전시 ‘편견을 넘다: 소피 가먼드 구출견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는 6월1일까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201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우리나라를 찾은 가먼드 작가를 27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본사에서 만났다. 개들과의 춤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사진작가 소피 가먼드가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국 휴메인소사이어티인터내셔널(HSI)은 2019년 세계적인 작가 소피 가먼드에게 한국의 개농장에서 구조된 개들의 촬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가먼드 작가는 10여년 전 미국으로 이주하며 개를 모델로 한 여러 작품을 발표해왔다. 주로 동물보호소에서 입양을 기다리는 개들이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악한 환경에 놓인 개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특히 인간과 개가 맺고 있는 관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람과 같이 살기 위해 미용과 목욕을 해야 하는 개들의 모습을 위트있게 담아낸
‘웻 도그’(Wet Dog) 시리즈로 2014년 ‘소니 세계 사진 어워드’를 수상했다. 사납고 키우기 어렵다는 편견 때문에 입양이 어려운 견종인 핏불에게 화관을 씌워 사랑스러운 모습을 포착한
‘화려한 핏불’(Pit Bull Flower Powe)도 대표적이다. 작가는 미국 전역의 보호소에 버려진 450마리의 핏불을 촬영했고 이 작품으로 ‘2020년 국제 사진 어워드’를 받았다.
소피 가먼드 작가가 서울 경복궁역 서울메트로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편견을 넘다’ 전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 HSI 제공
사진가들은 찍기 어려운 피사체 중 하나로 동물을 꼽는다. 아기, 동물, 아름다움(3B·Baby, Beast, Beauty)은 대중의 주목도가 높지만 그만큼 어려운 주제로 꼽힌다. 게다가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개농장에서 살아나온 개들의 진면목을 담아내야 한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개들이 태어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고통 받았던 농장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다시 만난 구출견…“모두 이 순간을 위한 것”
“사실 나는 그 공간에 압도당하고 말았어요. 개들은 케이지에서 나오고 싶어서 짖고 있었고, 두려움에 사람을 피하고 있었어요. 지척에 바로 풀과 꽃, 나무가 있지만 개들은 계절의 변화조차 느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완전히 세상과 단절돼 있었던 거죠.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처럼 보였어요.”
소피 가먼드 작가가 2021년 4월 미국 시카고 스튜디오에서 개농장에서 만났던 개 ‘샘’을 촬영하고 있다. 한국 HSI 제공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개들의 생명력을 포착했다. 가먼드는 사람을 경계하고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어미 개 사이의 새끼들을 보았다. ‘샘’은 그 중 하나였다. 진도믹스견 샘은 가먼드의 손길을 받고 싶어 철창 틈으로 다가왔고, 농장주가 먹이를 들고 와도 음식보다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가먼드는 “샘이 원하는 건 오직 인간과의 교감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샘은 2019년 경기도 여주의 농장에서 구조돼 미국으로 입양됐다. 가먼드는 2년 뒤 사진전 준비를 위해 스튜디오에서 다시 샘과 상봉할 수 있었다.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고 친근한 샘을 카메라에 담기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웠던 점은 너무 좋은 사진이 여러 장 나와서 한 장을 고르기 쉽지 않았단 점이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내가 이걸 한 거지’라고 깨달았어요.”
이번 사진전의 구출견들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식용 개’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주로 식용 개라고 여겨지는 도사나 진도믹스견뿐 아니라 웰시코기, 포메라니안과 같은 품종견들도 작품의 모델이 됐다. 가먼드는 “개농장에 실제 가보면 알게 된다. 식용 개와 반려견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실제로 그곳엔 진도나 도사 이외에도 굉장히 다양한 품종견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작가 소피 가먼드가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며 자신이 10살 무렵 처음 찍은 동물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첫 모델은 반려토끼였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의 작품엔 거의 늘 개가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콜롬비아, 푸에르토리코, 몰도바 등 세계 5~6개국에 가서도 늘 보호소의 개들 혹은 버려지고 방황하는 거리의 개들을 촬영했다. 인간을 위해 치장하고 도그쇼에 나온 개들도 찍고, 직접 개들을 위한 촬영소품이나 수공예품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서 개들이 착용하고 나온 스카프나 목걸이도 그가 직접 만든 것들이다.
“우리가 개에게 해준 건 뭔가요?”
가먼드는 장식품들을 ‘결혼 반지’에 비유한다. 개들에 대한 헌신과 약속을 뜻한다는 것이다. “개와 인간의 유대관계는 수천 수만 년 전으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정말 독특하고 유일하죠. 그 오랜 시간 동안 개는 인간에게 충실했어요.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 눈썹을 움직이도록 진화했고, 200개 단어 이상을 알아들어요. 그런데 우리가 개에게 해준 건 뭐죠?”
푸에르토리코 촬영 때 입양한 반려견 ‘맥 로빈’은 못 생겼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보호소에 남겨졌다. 소피 가먼드 인스타그램 갈무리
그는 이번 사진전에서 밝은 모습의 구조견 이면에 담긴 메시지에 사람들이 주목하길 바란다. 개식용 종식 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지지부진한 한국의 현실에 이번 전시가 ‘다리’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정부는 느립니다. 중요한 건 시민의 목소리죠. 관심을 다시 한 번 모아주세요. 개식용이 없는 미래는 곧 올거예요.” 그때까지 그는 개들과의 즉흥 댄스로 계속 개들과의 우정에 보답할 생각이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