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론으로 촬영한 남극 범고래. 규조류가 피부에 들러붙어 누런색을 띤다. 영하 2도에 이르는 수온 때문에 피부로 가는 혈관을 차단해 낡은 피부를 떼어내지 못한다. 존 더반, NOAA 제공.
고래는 포유류 최고의 여행자이다. 크릴 등 먹이가 풍부한 여름 동안 북극과 남극 바다에서 4∼6달 동안 폭식으로 지방을 축적한 뒤 따뜻한 열대·아열대 바다로 이동해 새끼를 낳아 길러 극지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장기간 단식한다. 예를 들어, 귀신고래는 해마다 왕복 1만5000∼2만5000㎞를 이렇게 이동한다.
1세기 전부터 포경선원들은 극지방의 고래가 열대 바다로 가 새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정설도 ‘고위도-포식, 저위도-번식’ 모델이었다. 이런 통념을 뒤집는 새로운 가설이 나왔다. 고래는 출산이 아니라 피부관리를 위해 따뜻한 열대 바다로 해마다 먼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로버트 피트먼 미국 오리건주립대 해양생태학자 등 미국과 이탈리아 연구자들은 2009∼2016년 동안 남극에서 범고래 62마리에 위성추적 장치를 달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이런 주장을 폈다. 과학저널 ‘해양포유류학’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주 저자인 피트먼은 “이번 연구에서 지체된 피부 허물 벗기가 남극 범고래가 장거리 이동을 이끄는 원동력이라는 증거를 내놓았다”며 “(범고래 이외에도) 극지방에서 먹이를 먹고 열대 바다로 이동하는 모든 고래가 생리적으로 힘든 환경에서 풍부한 먹이를 섭취하면서 건강한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낡은 피부 벗기기 이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남극 범고래 어미와 새끼. 어미의 피부는 규조류로 오염돼 있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의 피부는 깨끗하다. 피트먼 외 (2020) ‘해양포유류학’ 제공.
고래가 왜 장거리 이동을 하는지는 과학계의 오랜 논란거리였다. 새끼를 낳기 위해 따뜻한 바다로 간다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주장은 갓 태어난 새끼가 지방층이 부족해 극지방의 찬물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연구 결과 북극고래와 범고래 등 일부 고래를 포함해 물개류처럼 훨씬 몸이 작은 포유류도 북극에서 너끈히 번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히려 대왕고래처럼 거대한 몸집이 열대 바다에 가면 열을 방출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연구도 나왔다.
주 저자인 로버트 피트먼 미국 오리건주립대 해양생태학자는 “그동안 사람들은 고래에 관한 한 피부 허물 벗기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허물 벗기는 따뜻한 바다로 이동해야만 할 수 있는 생리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미 해양대기국(NOAA)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포유류나 조류는 오래된 털이나 피부 조각, 낡은 깃털 등을 주기적으로 떼어내고 새것으로 교체한다. 연구자들은 차가운 극지방에서 고래는 이런 피부 재생 작업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규조층으로 덮인 남극 범고래의 모습. 추운 남극 바다에서는 피부관리를 할 수 없다. 피트먼 외 (2020) ‘해양포유류학’ 제공.
영하의 바닷물에서 체온을 잃지 않기 위해 고래는 피부로 가는 혈관을 차단해 단열하는 방식을 이용한다(개가 얼음판 위에서 발바닥으로 가는 혈관을 차단해 발이 시리지 않은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나 피부 혈관이 차단되면서 피부세포의 재생이 어려워지고 정상적인 낡은 피부 교체가 중지된다.
따라서 더운 바다로 이동하면 피부의 대사가 회복돼 체온을 잃을 염려 없이 낡은 피부를 교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고래가 피부를 관리하러 극지에서 열대로 이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연구자들은 위성추적 장치를 부착한 4무리의 남극 범고래 가운데 3무리의 이동 궤적이 그것을 말해 준다고 밝혔다. 범고래들은 짧은 기간 동안 극지에서 열대 바다까지 직선 경로로 쉬지 않고 갔다가 지체하지 않고 돌아왔다.
펭귄을 즐겨 사냥하는 무리의 한 범고래는 남극에서 뉴질랜드 동쪽 남태평양까지 범고래로서는 최장 기록인 왕복 1만1000㎞를 직선으로 이동했다. 영하 2도인 바다와 24도인 바다를 한 두 달 만에 오갔다. 물고기를 주로 먹는 무리의 한 범고래는 남극에서 브라질 앞바다까지 직선으로 왕복하는 여행을 5달 보름 만에 2번이나 했다.
5.5달 동안 남극에서 브라질 앞바다까지 2번 왕복한 범고래의 이동 궤적. 피트먼 외 (2020) ‘해양포유류학’ 제공.
먹이가 많은 얕은 바다를 거치지 않고, 열대 바다에서 오래 머물지도 않은 것은 그 여행이 번식 아닌 다른 목적이었음을 가리킨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범고래의 이동 속도는 새끼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빨랐다.
또 다른 증거는 고래의 피부 상태였다. 극지방의 여름 동안 식물플랑크톤인 규조류가 번성해 고래 피부를 두껍게 덮어 누런색으로 오염시킨다. 그러나 열대 바다에서 돌아온 고래와 갓 태어난 고래는 피부가 깨끗했다. 사람 등은 끊임없이 낡은 피부를 떼어낼 수 있지만, 고래는 연례행사로만 가능하고, 이를 위해 장거리 이동을 하게 된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설명했다.
남극 밍크고래의 깨끗한 피부는 방금 열대 바다에서 돌아왔음을 가리킨다. 피트먼 외 (2020) ‘해양포유류학’ 제공.
남극 밍크고래. 남극해에서 1달 이상 머무르면 이런 색깔로 오염된다. 피트먼 외 (2020) ‘해양포유류학’ 제공.
그렇다면 왜 피부를 벗기는 곳에서 새끼도 낳을까. 연구자들은 “고래가 따뜻한 바다로 이동해 피부를 관리했는데, 그곳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는 쪽으로 적응했을 것”이라고 논문에 적었다. 피부관리하러 갔다가 여건이 좋으니 번식도 하게 됐다는 얘기다. 따뜻한 바다에는 새끼의 천적도 적고 성장도 빠르다.
연구자들은 북극의 흰고래가 여름에 따뜻한 물이 흘러오는 강하구에 모여드는 것도 한때 번식과 먹이를 찾아 온 것으로 보았지만 결국 낡은 피부를 벗기기 위한 행동으로 밝혀졌다고 소개했다. 북극 원주민인 이누잇 사냥꾼이 오래 전부터 전해 온 “흰고래는 따뜻한 강물이 오는 곳에서 허물을 벗는다”는 말이 옳았던 것이다.
인용 저널:
Marine Mammal Science, DOI: 10.1111/mms.12661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