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의 혀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자리 잡은 등각류 기생충. 기생충은 지구에서 가장 흔한 생물이지만 열에 아홉이 종과 생태에 관해 알려지지 않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갯강구나 쥐며느리와 함께 등각류에 속하는 갈고리벌레과의 ‘시모토아 엑시구아’(
Cymothoa exigua)는 물고기의 혀를 잘라내는 기생충이다. 아가미를 통해 물고기 입으로 들어간 뒤 혀의 혈관을 절단해 혀가 잘려나가면 그 자리에 들어가 나머지 혀 근육과 자신을 연결해 혀 구실을 하며 산다.
다른 많은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이 동물이 어떻게 번식하고, 물고기에는 어떤 해를 끼치며 생태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구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기생충이 생태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며, 이들이 멸종하기 전 최대한 많은 종을 밝힐 ‘글로벌 기생충 프로젝트’를 지구 차원에서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숙주를 죽이지 않고 더부살이를 하는 ‘기생’은 특별은 삶의 방식이 아니다. 생물학자들은 알려진 생물 종의 적어도 절반은 기생생물이라고 본다. 데이비드 휴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생물학자 등은 지난해 과학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린 논문에서 “기생은 이제까지 진화해온 생물의 생활사 가운데 가장 흔한 형태여서, 육식이나 초식 같은 다른 형태의 먹이활동보다 훨씬 빈번하게 출현했다”고 적었다.
꿀벌에 기생하는 기생벌. 곤충에는 알려지지 않은 종이 많지만, 그 곤충 속의 기생충은 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기생충 하면 흔히 회충, 촌충 등 포유동물의 장내 기생충을 떠올리지만 기생생물에는 말라리아 원충 같은 원생동물, 이나 모기 같은 곤충, 흡혈박쥐와 뻐꾸기 같은 포유류와 조류, 겨우살이 등 기생식물을 비롯해 곰팡이, 세균, 바이러스까지 매우 다양한 생물이 들어있다. 지구의 생물은 300만∼1000만 종이고, 이 가운데 조사된 종은 140만 종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70만 종의 기생생물이 지구에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보수적인 추정일 뿐, 알려지지 않은 곤충을 모두 포함하면 지구의 생물 종은 훨씬 많다고 알려진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연구소는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곤충이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며 “지구의 곤충 종은 200만∼3000만 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곤충 몸속엔 다시 진드기, 곰팡이, 세균 등 더 작은 생물이 산다. 또 이 가운데는 특정 종의 곤충에만 사는 종도 있어 생물 종은 훨씬 더 늘어난다. 브렌단 라르센 미국 애리조나대 생물학자 등은 2017년
지구의 생물을 10억∼60억 종으로 추정하고, 그 대부분을 세균이 차지할 것으로 보았다. 예컨대, 갑각류에 기생하는 선충만도 8000만 종에 이를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했다.
포유동물의 장내 기생충인 간흡충(간디스토마).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기생생물 종이 다양하다는 것은 생태계 속에서 그만큼 다양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먹이 그물에서 기생생물의 역할은 지대하다.
앤디 돕슨 미국 프린스턴대 생물학자 등은 “미국 캘피포니아와 멕시코 바하의 염습지를 조사한 결과 어느 지점이든 생물 종의 40% 이상이 기생생물이었으며, 이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생물 종의 60%에 얹혀사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2008년
미 국립학술원 회보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연구자들은 “기생 종을 포함하니 기존 먹이 그물이 4배로 복잡해졌다”며 “기생생물은 먹이 그물의 구조를 지탱하는 숨겨진 ‘암흑물질’”이라고 적었다.
기생충은 숙주가 지나치게 번창하는 것을 조절하는 생태계 서비스도 한다. 또 최근에는 척추동물의 장내 기생충이 유해한 중금속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척추동물은 몸속에 흡수된 카드뮴, 아연 등 중금속을 담즙으로 둘러싸 독성을 완화하는데, 고농도의 중금속에 잘 견디는 장내 기생충이 담즙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척추동물 몸속 중금속의 30∼50%까지 제거한다는 것이다.
기생충은 생물 진화를 이해하는 데도 기여한다. 최근 주목받는 숙주의 뇌 조종 기생충이 그런 예다. 찰스 다윈과 함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을 발견한 영국의 자연사학자 알프레드 월러스가 1859년 발견 좀비 곰팡이는 숙주인 개미의 행동을 조종해 자신의 후손을 퍼뜨린다. 이 곰팡이에 감염된 열대 개미는 개미 통로 위에 드리운 풀잎 끄트머리에 올라 잎을 물고 죽는다. 사체에서 나온 곰팡이 포자는 통로를 오가는 개미 머리 위에 떨어진다.
좀비 곰팡이에 감염된 열대 개미. 개미 통로 위에 곰팡이 포자를 뿌리기 위해 풀잎 끝을 물고 죽는다. 휴스 외 (2019)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숙주의 뇌를 조종하는 기생충은 이 밖에 쥐를 고양이 오줌 냄새에 끌리게 해 잡아먹히도록 유도하는 기생충 톡소플라스마 곤디, 메뚜기 등을 번식지인 개울물 속으로 자살하도록 이끄는 연가시 등 다수의 사례가 알려져 있다.
이처럼 중추신경계를 조종하는 기생충이 뇌 진화를 촉발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마르터 델 주디시 미국 뉴멕시코대 진화심리학자는 지난해 과학저널
‘계간 생물학 리뷰’에 실린 논문에서 “기생충의 숙주 하이재킹은 수억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며, 그동안 20차례 이상 독립적으로 진화했다”며 “이런 조종에 대항해 숙주 동물이 두뇌에 대한 접근 제한, 조종 비용 늘리기, 신호 복잡화 등을 통해 두뇌가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기생충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촉발한 것은 세계적인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최근의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포함해 사람과 야생동물 모두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한 ‘글로벌 바이러스 유전체 프로젝트’가 지난해 10년을 목표로 12억 달러가 투입돼 시작됐다. 목표는 신종 감염병의 원천인 포유류와 조류 바이러스의 85%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넘어 기생충 전반에 대한 조사가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콜린 칼슨 미국 조지타운대 생물학자 등 미국 연구자들은 미발간된 생물학 분야의 연구를 동료 비평을 듣기 위해 미리 공개하는 누리집인
‘바이오 리시브’ 1월호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글로벌 기생충 프로젝트’를 하루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쥐의 뇌를 조종해 고양이에 먹히도록 유도하는 톡소플라스마 원생생물의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현재 기생충학이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감소 등 지구 차원의 변화에 따라 기생충에 대한 이해가 시급하게 필요하지만, 정작 자료는 부족한 심각한 괴리에 봉착했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기생충 열에 아홉은 알려지지 않았다”며 “장내 기생충만 하더라도 지구 전체의 기생충을 (학술지에) 기재하려면 536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연구자들은 “척추동물의 장내 기생충은 대략 10만∼35만 종으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85∼95%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인체의 유전체를 규명한 글로벌 프로젝트인 ’휴먼 게놈 프로젝트’처럼 기생충이 사라지기 전 서둘러 이들의 분류학적, 생태학적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