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애니멀피플 생태와진화

천적 이용해 경쟁자 제압, 동물 못잖은 야생담배의 전략

등록 2019-01-07 17:05수정 2019-01-07 17:23

[애니멀피플]
뜯어먹히다 애벌레 다 자라면 화학물질 분비해 이웃 경쟁자로 쫓아
즉시 방어물질 분비보다 유리, “동물 같은 식물 적응 행동 놀라워”
야생담배 잎에 들러붙어 뜯어먹는 박각시나방 애벌레. 담배는 일방적으로 뜯어먹히는 것이 아니라 인근 경쟁자를 겨눈 전략을 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야생담배 잎에 들러붙어 뜯어먹는 박각시나방 애벌레. 담배는 일방적으로 뜯어먹히는 것이 아니라 인근 경쟁자를 겨눈 전략을 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같은 나이 경쟁자가 바로 옆에 있다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평생 죽기 살기의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그런 상황을 돌파하는 동물 뺨치는 전략이 야생담배에서 발견됐다. 천적에 뜯어먹히면서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던 담배는, 시기가 무르익으면 방어물질을 분비해 먹성 좋은 애벌레를 경쟁자로 내몰았다.

미국 남서부 건조지대가 자생지인 야생담배는 산불이 나면 씨앗이 묻혀있던 땅속에서 일제히 돋아난다. 담배 씨앗이 싹트지 못하도록 막던 발아 억제물질이 제거되는 데다, 연기가 발아의 방아쇠를 당기기 때문이다.

미국 남서부가 원산지인 야생담배의 개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미국 남서부가 원산지인 야생담배의 개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모처럼 온 기회를 잡은 담배는 일시에 빽빽하게 돋기 때문에 개체 사이의 경쟁이 극심하다. 특히 건조지대라 수분 확보가 관건이어서 조금만 뒤처져도 죽음이 기다린다.

갓 돋은 야생담배의 새순을 노리는 것은 전적으로 담배를 먹고 사는 박각시나방 애벌레다. 나방은 담배마다 알을 하나씩 낳는데, 수㎎이던 애벌레가 3주가 지나면 8∼10g의 거대한 몸집으로 자란다.

만일 단년생인 담배가 아무런 대책 없이 애벌레에 뜯어먹힌다면 속절없이 죽는다. 그렇지만 야생담배를 포함한 많은 식물이 초식 곤충에 대항하는 화학적 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애벌레가 잎을 물어뜯으면 담배는 즉각 니코틴, 페놀, 휘발성 화학물질을 분비해 애벌레에게 끔찍한 맛과 소화불량을 선사하고 외부에 이 사실을 알려 기생벌 등 애벌레 천적을 불러들인다(■ 관련 기사: 뇌 없는 식물서 신경계 비슷한 방어 시스템 확인).

인접해 경쟁 관계인 야생담배 한 그루에 박각시나방 애벌레가 생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인 모델. 무대응과 즉각 대응보다 지체된 대응을 한 개체가 유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크만 외 (2019) ‘아메리칸 내추럴리스트’ 제공.
인접해 경쟁 관계인 야생담배 한 그루에 박각시나방 애벌레가 생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인 모델. 무대응과 즉각 대응보다 지체된 대응을 한 개체가 유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크만 외 (2019) ‘아메리칸 내추럴리스트’ 제공.
야생담배 두 그루가 인접해 있을 때 한 그루에서 애벌레가 깨어났다. 이 담배는 어떤 전략을 펴는 것이 생존에 유리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경쟁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니 논외이다. 문제는 화학적 방어시스템을 언제 작동하는 것이 좋은가이다. 화학물질 분비에는 값비싼 대가가 따른다. 화학물질을 생산하느라 성장과 생식에 뒤처진다.

피아 박만 독일 종합 생물 다양성 연구센터 (iDiv) 생태학자 등 독일 연구자들은 야생담배와 박각시나방을 이용한 현장실험과 모델링을 통해 최적의 방어물질 분비 시점을 알아봤다. 그 결과 ‘식물의 천적 방어 행동은 빠를수록 유리하다’는 통념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히려 방어 시기를 늦춰 상당히 잎을 뜯어먹히다 방어물질을 분비하는 식물이 경쟁자를 따돌리는 데 유리했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아메리칸 내추럴리스트’ 1월호에 실렸다.

야생담배를 전문적으로 포식하는 박각시나방 애벌레. 다 자라면 10㎝ 길이에 이른다. 다니엘 슈원,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야생담배를 전문적으로 포식하는 박각시나방 애벌레. 다 자라면 10㎝ 길이에 이른다. 다니엘 슈원,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애벌레를 감지하자마자 방어물질을 분비하는 것은 여러모로 유리해 보인다. 전문적으로 담뱃잎을 뜯어먹는 박각시나방 애벌레도 고농도의 니코틴을 섭취하면 성장이 느려지고 사망률이 커진다. 게다가 휘발성 신호물질을 감지하고 다가오는 기생벌 등 포식자는 어린 애벌레를 선호한다. 처음부터 잎의 손상을 막는 것도 중요하다.

연구자들은 실험에서 방어물질을 생산하지 않도록 한 담배 400개체 가운데 171개체가 애벌레 포식과 이웃 담배와의 경쟁 탓에 죽었다고 밝혔다. 화학 방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증거다. 그러나 조기대응의 부작용도 심각하다. 방해물질을 막느라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방해물질을 분비한 식물의 씨앗의 무게는 그렇지 않은 개체보다 50%나 적다는 보고도 있다. 무엇보다 포식자로 인한 손실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어도 이런 부담 때문에 이웃 경쟁자에게 밀리는 치명적 결과를 빚는다. 담배 400개체 가운데 즉시 방어물질을 분비한 117개체가 죽었다.

연구자들은 방해물질 분비 시기를 늦추는 전략이 담배에 가장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중요한 건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라며 “애벌레가 3령에 접어들어 식욕이 왕성하고 가장 민감할 때 방해물질을 분비한다”고 밝혔다. 이때쯤부터 애벌레는 전체 섭취량의 90%를 먹는다. 게다가 충분한 이동능력이 있어 방해물질에 노출되면 얼른 이웃 경쟁 담배로 이동한다. 결국 야생담배는 애벌레가 경쟁자 담배에 치명적 타격을 줄 만큼 덩치가 커졌을 때까지 피해를 감수하며 기다려 경쟁에 이기는 전략을 편 셈이다.

미국 남서부 건조지대에 자라는 야생담배. 동물 못잖은 적응 행동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미국 남서부 건조지대에 자라는 야생담배. 동물 못잖은 적응 행동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초식동물을 매개한 식물 사이의 경쟁이 대응시간 지체를 진화시켰다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진 바 없으며, 식물의 적응 행동으로서 놀라운 사례”라며 “적응 능력 면에서 식물의 행동은 동물 못지않고, 붙박이 삶을 산다고 해서 적응 잠재력이 줄어들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논문에 적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Pia Backmann et al, Delayed Chemical Defense: Timely Expulsion of Herbivores Can Reduce Competition with Neighboring Plants, The American Naturalist, vol. 193, no.1, january 2019, DOI: 10.1086/700577

조홍섭 ecothin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애니멀피플] 핫클릭

1600㎞ 날아가 날개 부러진 채 발견된 21살 매의 노익장 1.

1600㎞ 날아가 날개 부러진 채 발견된 21살 매의 노익장

노화의 3가지 수의학적 지표…우리 멍냥이는 ‘어르신’일까 2.

노화의 3가지 수의학적 지표…우리 멍냥이는 ‘어르신’일까

새끼 지키려, 날개 부러진 척한다…댕기물떼새의 영리한 유인 기술 3.

새끼 지키려, 날개 부러진 척한다…댕기물떼새의 영리한 유인 기술

아부지 차 뽑았다, 히끄야…첫 행선지는? 4.

아부지 차 뽑았다, 히끄야…첫 행선지는?

서두르지 마세요…반려동물의 ‘마지막 소풍’ 배웅하는 법 5.

서두르지 마세요…반려동물의 ‘마지막 소풍’ 배웅하는 법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