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개미 병정개미. 나이 든 병정개미는 큰 턱으로 통로를 막아 포식자를 막는 전략을 편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유전적으로 개미보다 바퀴벌레에 가까운 사회성 곤충인 흰개미 무리에서 각 개체는 전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런 전체주의 논리가 가차 없이 관철되는 새로운 사례가 발견됐다. 무리의 안녕을 위해 누군가 희생해야 할 때 앞으로 남은 수명이 가장 짧은 나이 든 개체가 앞장선다. 우리나라와 일본 등에 서식하는 흰개미(학명
Reticulitermes speratus)는 포식자를 가장 앞장서 막는 방어선에 늙은 병정개미를 투입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흰개미의 둥지 구조(위)와 방어전략. 외각의 들머리에서 나이 많은 병정개미가 통로를 막고 젊은 개미는 여왕개미를 지킨다. 사키 야나기하라 외, ‘바이올로지 레터스’92018) 제공.
사키 야나기하라 일본 교토대 곤충생태학자 등 일본 연구자들은 실험실에 자연 상태와 비슷한 구조의 흰개미 둥지를 지어 놓고 흰개미를 잡아먹는 포식자 개미를 넣었을 때 어떤 방어전략을 펴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둥지의 들머리에서 포식자를 막는 최전선에는 주로 늙은 병정개미가 있었고, 젊은 개미는 둥지 안쪽에서 여왕개미를 지켰다고 과학저널 ‘바이올로지 레터스’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로 흰개미 병정개미는 나이를 먹을수록 위험한 일을 맡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는 전체 병정개미의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낳아 집단 전체의 번식 성공에 기여한다”고 적었다.
땅속에 사는 이 흰개미는 일련의 둥지를 터널로 연결한 곳에 산다. 둥지 사이의 통로는 흰개미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땅속이나 둥지 한가운데 깊숙한 곳에 여왕이 위치한다. 병정개미는 이 좁은 통로에서 커다란 위턱을 벌려 침입자를 막아서는 전략을 편다. 연구자들은 이를 ‘살아 있는 마개’라고 불렀다. 둥지 들머리의 통로에서 늙은 병정개미는 큰 턱을 벌려 침입하는 포식자에 격렬하게 맞선다. 굴 입구에서 전투를 벌이는 늙은 병정개미 가운데는 수컷보다 암컷이 더 많았다.
둥지 통로를 막고 포식자와 맞서는 나이 든 병정개미. 사키 야나기하라 외, ‘바이올로지 레터스’92018) 제공.
포식자에게 달려들어 둥지를 지키는 다른 흰개미 종에서 병정개미의 비중이 40%에 이르는데 견줘 ‘마개 전략’을 쓰면 방어에 나서는 병정개미의 희생은 크지만 효과적이어서 병사의 비중은 4%에 그쳤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번식능력이 없는 흰개미의 병정개미는 수명이 5년 정도다. 어렸을 때는 애벌레를 돌보고 집을 수선하며 여왕개미를 지키는 등의 일을 하다 나이를 먹으면 최전선 둥지 수호에 나선다. 이런 방식의 노동 분업은 꿀벌 일벌에서도 나타나 젊었을 때 벌통 안에서 일하다가 나이가 들면 둥지 밖에서 위험한 일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늙은 흰개미가 위험한 일을 하는 이유가 덩치가 커져 자연히 그런 일을 맡은 걸까 아니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에서 병정개미의 ‘마개 전략’ 덕분에 나이와 크기 요인을 구분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나이 든 개미나 젊은 개미나 통로를 위턱으로 막는 능력은 비슷했다. 따라서 나이 차이에 따른 노동 분업이 선명히 드러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방어 과정에서 희생자가 불가피하다면 나이 많은 개미가 그 일을 막는 것이 병정개미 전체의 평균수명을 높이고 결국 집단의 번성에 기여한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Yanagihara S, Suehiro W, Mitaka Y, Matsuura K. 2018 Age-based soldier polyethism: old termite soldiers take more risks
than young soldiers.
Biol. Lett. 14: 20180025. http://dx.doi.org/10.1098/rsbl.2018.0025
조홍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