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발 끝이 흰 러시아 ‘표범의 땅’ 국립공원의 한국표범. 야생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형질로 근친교배의 결과이다. ‘표범의 땅’ 국립공원 제공.
표범은 몸길이의 절반이 넘는 길고 굵은 꼬리로 몸의 균형을 잡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러시아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 서식하는 한국표범(아무르표범) 가운데 꼬리가 스라소니처럼 뭉뚝하거나 짧은 개체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게다가 집고양이처럼 발끝이 흰 표범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야생에 없는 이런 형질은 근친교배의 명백한 증거로 낮은 유전다양성이 한국표범의 장기적 생존을 위협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7일 윤미향 의원 등의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한국 범 복원 토론회에서 “호랑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상징동물인 표범을 보전하려면 동물원의 유전자원을 야생에 도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내에도 한국표범의 서식지 외 사육시설을 만들어 개체군을 확립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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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찍힌 표범 절반이…
한국표범은 한때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연해주 남부에 분포했지만 현재는 북한·중국·러시아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100∼120마리가 살아남아 세계의 표범 9개 아종 가운데 가장 심각한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표범 분포 지역의 변천. 임정은 박사 제공.
한때 멸종 직전에 이르러 2000년 30마리가 살아남았지만 북한 접경에 ‘표범의 땅’ 국립공원을 설치하는 등 러시아 당국의 보전노력 등에 힘입어 2020년엔 100마리 이상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급격히 개체수가 증가했는데도 애초 적은 집단에서 출발해 근친교배가 계속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날 주제발표를 한 임정은 국립생태원 멸종위기종복원센터 포유류팀장은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수백 대의 무인카메라에 최근 들어 꼬리가 뭉뚝한 표범이 찍히기 시작했고 발끝이 흰 개체는 전체 촬영 표범의 절반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고 말했다.
‘표범의 땅’ 국립공원 무인 카메라에 찍힌 꼬리가 뭉툭한 한국표범(왼쪽 A, B, C, D)과 발끝이 흰 한국표범(오른쪽 A, B). 마르첸코바 외 2020 제공.
개체수 감소로 인한 근친교배 문제는 단지 서식지 감소와 남획뿐 아니라 애초 한국표범의 진화과정에서 비롯됐다. 요한나 파이만스 독일 포츠담대 생물학자 등은 지난해 과학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린 논문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표범 26마리의 게놈을 분석해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표범의 조상 가운데 소수가 50만∼60만년 전 단 한차례 아시아로 퍼져 나왔음을 밝혔다. 한국표범은 아시아의 동쪽 끝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더욱 유전다양성이 낮아졌다.
표범의 9개 아종 분포 지역.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표범은 50만∼60만년 전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한국표범은 확산의 끄트머리에 해당해 유전다양성이 애초 낮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한국표범은 야생개체의 곱절 가까운 220마리가 동물원에 산다. 이들 사육 개체의 유전다양성은 야생보다 높다. 따라서 사육 표범을 야생에 돌려보내 새로운 유전자원을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이 행사를 주관한 한국범보전기금 이항 대표(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유럽과 미국 동물원은 한국표범의 번식을 가능한 한 억제하고 혈통을 철저히 관리하는 한편 국제협력을 통해 우수한 형질의 표범을 반자연 상태에서 적응·훈련해 야생에 풀어놓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동물원수족관협회(EAZA)의 서식지 외 보전위원회(EEP)에 참여하는 한국표범은 113마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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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내려온다’ 복원은 필연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동물원이 유일하게 한국표범 2마리를 사육 중이다. 2018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동물원에서 들여온 공인된 한국표범이지만 모두 수컷이다. 멸종위기종의 서식지 외 보전기관인 서울동물원은 장차 한국표범을 증식하기 위해 기존의 중국표범을 내보냈다.
러시아는 2015년 14개 국제단체와 함께 수립한 표범 보전계획에 따라 국제적인 혈통관리로 증식한 표범을 적응 훈련을 거쳐 방사하기로 했지만 아직 수용할 준비가 안 됐다. 유럽에서 증식한 표범을 당장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애초 한국표범의 서식지도 아니지만 유럽 각국의 동물원은 러시아 서식지에 재도입할 표범의 혈통을 관리해 증식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영국 콜체스터 동물원의 한국표범. 윌리엄 워비,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유럽 동물원 수족관 협회(EAZA)는 지난해 7월 국립생태원에 한국표범의 증식과 자연적응 훈련, 재도입 사업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면서 혈통관리가 잘 된 암컷 한국표범 2마리를 무상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항 교수는 “유럽 증식 프로그램이 스코틀랜드에서 적응 훈련한 암컷 2마리를 한국의 반자연 상태에서 사육하다 여건이 마련되면 러시아로 보내 방사하자는 것”이라며 “서울동물원의 수컷을 염두에 둔 번식용 도입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환경부는 번식을 위한 암컷 확보에 더 관심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박소영 환경부 생물다양성 과장은 이날 “
기존 표범과 유전적 근연관계를 확인한 뒤 도입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연말 국립생태원 멸종센터가 연 표범 도입 전문가 자문회의에서는 “현재 서울동물원이 보유하고 있는 개체와 교배 가능한 개체를 추가 도입하는 방안도 이이피(EEP)와 협의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주로 나왔다.
‘표범의 땅’ 국립공원의 야생 한국표범. 야생보다 유전다양성이 높은 동물원 개체가 이 종의 생존을 지키는 데 핵심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표범의 땅’ 국립공원 제공.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보호종인 표범의 유전자원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정부가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증식사업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항 교수는 “국내외에 표범 사육과 보전번식 계획의 경험이 풍부하고 국제협력이 활발해 표범 도입에 따르는 안전성, 근친번식, 사육기법 등의 기술적 문제는 사소하다”며 “야생에 풀어놓지 못하더라도 서식지 외 보전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식물 종자 은행처럼 야생에서의 멸종을 대비해 국립생태원을 비롯한 전국 동물원을 네트워크로 만들어 한국표범을 30∼40마리까지 확보하면 유전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최태영 멸종위기종복원센터 복원연구실장은 “러시아의 한국표범이 이미 중국과 북한으로 확산하고 있어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표범 복원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며 “단기적으로는 표범을 서식지 밖에서 보전하는 국제협력 사업에 참여하고 남북협력의 기반을 닦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