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의 막이 오르던 2007년 2월, 박근혜 전 대표는 미국을 방문했다. 워싱턴을 거쳐 미주 후원회 발족식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다. 공항 게이트엔 수십명의 환영객이 나왔다. 대부분 양복 등 깔끔한 복장인데 유독 한 사람만 점퍼 깃을 올리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누군가 “정윤회다”라고 소곤댔다. 당시 그 광경을 목격한 인사는 “정윤회를 만난 적이 없어 신분 확인은 곤란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 사람이 ‘정윤회’라고 이 인사는 확신한다. 유력한 대선후보를 마중 나오면서 그런 복장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정윤회씨는 2004년 비서실장직을 그만두면서 박근혜 대통령 곁을 떠난 걸로 되어 있다. 이 인사는 “미주 후원회 행사에도 그 사람이 있었다. 정윤회가 여전히 영향력이 있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비선 문건을 둘러싼 검찰 수사는 막바지로 달려가지만, 진실은 안갯속이다. 검찰 수사대로라면, 십상시 모임이니 ‘정윤회의 박지만 미행설’ 등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한마디로 청와대 비서 3인방 뒤에 정윤회씨가 있다는 ‘비선 실세’ 주장은 근거 없는 낭설이란 얘기다. 최근 만난 여권 인사는 이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비서 3인방이 문제인 건 맞다. 그러나 그 뒤에 정윤회가 있다기보다는, 정윤회가 밖에서 자기 영향력을 과대포장했다. 정윤회의 호가호위에 박근혜 대통령의 비밀주의가 어우러져 시중에 비선 실세설이 부풀려졌다.” 나름 일리 있는 분석이다.
과거 정권에서도 권력 주변에 누가 숨은 실세니 하는 소문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과거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과거엔 대개 야당이나 권력 외곽에서 먼저 의혹을 제기하고 권력에 가까울수록 이를 부인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번엔 정반대다. 외곽에 있는 사람일수록 ‘정윤회 실세설’에 반신반의한다. 반면, 권력에 가까울수록 그의 존재를 확신한다. 박 대통령 동생 지만씨는 정씨가 비서 3인방을 조종해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고 믿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청와대의 승마협회 감사 및 국·과장 교체 지시의 뒤에 정씨 부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른바 ‘친박’으로 분류되는 여권 인사 몇몇도 “정윤회가 3인방의 뒤에서 뭔가 역할을 하긴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선거운동 과정이나 그 이후에도 주요 사안을 박 대통령이 바깥의 누군가와 상의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2007년과 2012년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복수의 인사는 “회의에서 다수가 의견을 모았고 후보도 동의를 했다고 믿었는데, 금세 뒤바뀌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누군가 짧은 시간에 후보의 마음을 돌린 게 분명했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됐다. 정책 방향이나 인사가 하룻밤 새 뒤바뀐 게 한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장관이나 수석비서관은 “도대체 누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말 ‘정윤회’는 사람들의 호기심이 만들어낸 유령일까. 박 대통령을 잘 아는 여권 인사는 이런 설명을 했다. “누군가 대통령(또는 대통령 후보) 마음을 잡았다고 생각되면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 않는다. 이리저리 파헤쳐 양지로 끌어내서 견제하고 공격하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10년 동안 나름 대통령과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누군가’를 찾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정윤회’ 외엔 딱히 떠오른 이가 없다. 그러니 ‘정윤회’가 실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검찰이 아무리 아니라 해도, 국정개입 의혹이 사그라들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정윤회씨가 지난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출석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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