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이산가족 상봉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설날 임진각 망배단 합동 차례를 텔레비전으로 보며 다시 한 번 했다. 분단이 굳어진 6·25 전후부터 따져도 벌써 60년이 넘었다. 이산의 아픔이 어떤 것일지 상상하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긴 세월이다.
이번 상봉행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연초 제안을 북한이 24일 수용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 그러나 북한이 정부의 26일 실무접촉 제의에 응하지 않아 실제 상봉까지는 넘어야 할 고비가 남아 있다. 북한이 행사 시기를 “남측이 편리한 대로 정하라”고 해놓고 지난해 9월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없던 일로 하자”고 한다면, 그 책임이 북한 당국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남쪽도 너무 날로 먹으려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 사안으로만 다루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산가족 문제가 인도주의 사안인 건 맞다. 그러나 북한도 그렇게 생각할지, 그렇게 접근해서 될 일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같은 일이라도 처지가 다르면 달리 보이는 법이다.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이 유럽 바깥으로 진출하며 내세운 명분은 “통상하자”였다. 그러나 말처럼 통상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곧이어 통상 보호를 명목으로 무력이 동원됐고 식민 지배는 그렇게 막이 올랐다. 서구엔 통상과 교역 길 개척이었던 것이 당하는 쪽에선 식민지 침탈 과정이었다. 인도주의의 가까운 친척쯤 되는 인권은 또 어떤가. 미국은 매년 국가별 인권 실태 보고서를 내며 인권 수호국을 자처하지만, 2002년 발효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관한 로마 규정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자국 병사들이 전쟁범죄로 기소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양도할 수 없는 존엄한 권리도 정치에서 비켜서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북한에서 월남자 가족은 대부분 ‘사회주의 조국을 버린 반동분자’ 가족이다. 차별과 감시의 대상이다. 이제 와서 이들을 이산가족으로 배려하는 정책은 정치적으로 부담스런 일이다. 혹여 눈에 띌세라 숨죽여 지내던 월남자 가족들이 국가의 주선으로 월남자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하루아침에 돈푼깨나 만지며 거들먹거린다면 어떨까? 특히 출신성분이 중요한 북한에선 체제 위협으로 느끼지 않을까? 남쪽의 인도주의 문제가 북쪽에선 민감한 정치적 문제일 수 있다.
주판알을 튕겨봐야 얻을 건 없고 잃을 것만 있는 일을 어느 누군들 기꺼이 하려 하겠는가. “너도 얻을 게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통일 전 서독이 동독의 정치범 석방을 위해 돈을 지급한 ‘프라이카우프’를 시행한 건 이 문제가 인도적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정부는 그럼에도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 어떤 공개적 약속도 거부하고 있다. 북한의 요구 사항인 금강산 관광 재개도 “별개의 문제”라며 선을 그었다. 대신 박 대통령은 이산가족 상봉을 “남북관계 개선의 첫 단추”라고 했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에 나서는 것을 봐가며 관계를 개선해갈 생각이니 알아서 하라는 얘기로 들린다.
지난해 말 현재 통일부에 등록된 이산가족은 7만1480명인데, 52.8%가 80살 이상이다. 최근 6년간 연평균 3714명이 숨지는 등 이산의 한을 풀지 못하고 눈을 감는 이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은 시급한 인도적 문제”라고 북한을 압박하지만, 실제 행동에서 그렇게 절박감을 느끼기 힘든 건 유감이다.
북한은 인민의 허리띠를 더는 졸라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남쪽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북한이 이번에 또 돌연 “상봉행사를 못하겠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한 번 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북한에 어떻게 동기부여를 할지, 남북관계를 어떻게 끌고 갈지 그림을 그려둬야 하지 않을까.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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