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있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역사왜곡 그 자체인 교학사 교과서를 전국 1794 고등학교 중 단 한군데에서만 채택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았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과 자칭 보수단체들이 총력전을 펴다시피 하여 이따위 교과서를 우리 아이들에게 들이댔는데도 불구하고, 깨어 있는 시민들은 이 나라와 이 겨레와 우리의 미래세대를 위해 이런 책동을 막아낸 것이다.
정부·여당과 일부 사이비언론은 시민들의 이런 움직임을 가리켜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언동이라는, 자못 하품 나오는 논평을 내어놓은 바 있다. 이 와중에 ‘새정치신당’을 추진중인 안철수 의원이 교과서 논쟁에 대해 좌우이념 대립 양상인 것처럼, 이쪽도 저쪽도 문제라는 식의 묘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보도됐다. 안 의원의 이런 입장 표명에 대한 신랄한 지적들이 잇따르자 안 의원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해명을 내어놓았다. 나는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의 역사관은 확고부동해야 하며 정의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가 애매모호하다면 지도자 하면 안 된다.
몇해 전 한나라당(지금 새누리당) 당내 경선에 나섰던 어떤 젊은 정치인이 전두환씨의 연희동 집으로 찾아가 “잘 봐달라”며 ‘신고식’을 해서 구설에 오른 적이 있었다. ‘선거 때는 악마와도 손을 잡는다’는 속설이 있긴 하지만 분명히 어떤 선은 존재하는 것이다. 안 의원 일행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따랐다. 그러자 일행 중 한분이 “그건 백번 잘한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과연 그럴까? 그런 행동이 ‘중원’을 손아귀에 넣어주는 것일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무엇이 옳은 것이냐에 대한 당당한 입장 표명이 우선이고, 그다음은 그야말로 그다음이다.
보라! 새누리당과 <조선일보> 같은 언론이 입을 맞춘 듯 신당의 독자행동을 부추기고, 그것이 마치 ‘정도’인 양 언설을 늘어놓지 않는가. 6·4 지방선거의 셈법은 복잡한 방정식이 아니다. 산수다. 새누리당 등은 이 산수에 입각해 적진을 쪼개려 드는 것이고, 어디엔가 틈새가 보이기 때문에 집요한 여론 형성 작업에 나서는 것이다. 그 틈새란 바로 신당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것이고, 제1야당인 민주당의 엉거주춤함인 것이다.
왠지 자꾸 30여년 전 5공 때 생각이 난다. 피묻은 철권으로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 아류 5공 군부는 2중대(민한당)-3중대(국민당)를 만들어주고, 그들을 끼고 정치랍시고 했다. 요즈음 상황이 디테일은 달라졌을지라도 큰 모양새는 80년대를 연상케 한다.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놓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희대의 정권 창출 장치에 의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과,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들이 총출동해 치른 선거를 통해 집권한 박근혜 정권은 상당 부분 그 모습이 겹쳐 보이고, 30여년 전의 관제야당들과 현재의 무기력 야권 역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떤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야권에 그 내용은 차치하고 박근혜씨만한 당찬 내공을 갖춘 이가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 애써 중원을 보기에 앞서, 말도 안 되는 교과서를 저지한 시민들과 확실히 같이해야 한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쥐어짠 게 아니고 근대화시켜주었다고 가르치려 드는 교과서, 친일의 역사를 은폐하고 그들이 오히려 대한민국 건국과 근대화의 주역이었다고 쓰는 교과서, 민주주의를 처참히 짓밟은 군사독재를 옹호하는 교과서를 감싸고도는 집권당과 그 주변세력은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프랑스가 프랑스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2차대전 이후 수많은 나치부역자들을 철저히 처단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았기 때문이고, 오늘날 독일이 유럽 제1국가로 우뚝 선 것은 자신들의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고 거듭났기 때문이다. 썩은 정신으로 물신숭배에 빠지면 그 나라를, 그 국민을 누가 존중할 것인가? 아베 일본 총리의 저 모습은 우스갯거리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런 그가 이끄는 집단에 대해 단호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우리 내부부터 정의로운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제3의 길’이 아닌, 분명한 ‘정의의 길’을 말하고 몸으로 그 길을 보여주는 것만이 정의가 승리하는 길이라 믿는다.
나와 같은 당에 있는 이종걸 의원을 만나면 나는 이런 말을 한다. “이 의원 할아버지(우당 이회영 선생)께서는 독립운동하신다고 지금의 서울 명동 일대에 있던 당신 땅을 다 팔아 거금을 마련해서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무진 애를 쓰시다가 결국은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말년에 북경에서 밥 굶기를 밥 먹듯 하시다 일제에 잡혀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셨소. 우리 정말 이거 잊지 맙시다!” 우리가 이거 잊으면 사람이 아니잖은가. 일제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어머니께서 안 의사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조금 길더라도 다 보자.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인 줄을 알아라.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하게 목숨을 버리거라.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네가 사형언도를 받은 것이 억울해서 공소를 한다면, 그건 네가 일본에 너의 목숨을 구걸하는 행위이다. 너는 대한을 위해서 깨끗이 하고 떳떳하게 죽어야 한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아니하노니….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런 피눈물 나는 글이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사는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골목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하는 형님이 한분 계신다. 그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유공자이시다. 친일한 이들의 후손들은 일본 유학, 미국 유학 하고 돌아와 대부분 잘 먹고 잘산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대개 이 형님처럼 어렵사리 산다. 독립운동하느라 자식들 건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사회 정의가 바로 선 모습이 아니다. 나라가, 겨레가 바로 서려면 이 어려운 이들에게 눈길을 제대로 주어야 하고 심정적으로도 함께해야 한다.
‘살롱 사회주의자’란 말이 있다. 말과 행동거지가 다른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말이 명쾌해야 하고, 행동이 그와 같아야 한다. 용산, 쌍용자동차, 밀양과 같이 가면 ‘중원’이 같이 가자고 올 것이다.
문학진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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